약속 장소로 가는 길에서 본 풍경들
그날은 서울에서 저녁 약속이 있는 날이었다. 날씨가 춥다는 걸 빼면 여느 날과 다르지 않은, 그렇게 평범한 하루가 지나가는 평온한 날이었다.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고, 발걸음도 가볍게 느껴졌다.
머리 위로 겨울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얼굴에 와닿는 차가운 바람이 사이다처럼 시원하게 느껴졌다. 이런 느낌은 사무실에 앉아 있다가 점심을 먹으러 밖으로 나왔을 때나, 운전하던 차 안에서 내려 아메리카노를 사러 갈 때, 목덜미로 파고드는 차가운 공기가 몸 전체로 펴져 나가는데 난 이런 느낌이 너무 좋았다. 그렇게 한 겨울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매서운 한파가 며칠째 이어지고 있었다. 어쩌면 더운 겨울보다는 추운 겨울이 좋있던지도 모른다.
난 그날 저녁 서울에서 약속이 있었다. 이상한 일이지만 난 이렇게 추운 날, 평소와 다르게, 마을버스를 타고 사호선 금정역에 내렸다.
누구나 아무 이유 없이 그러고 싶은 날이 있는데 난 평소와 다르게 지하철이 타고 싶어졌다. 사람들로 붐비는 대중교통이 좋아지기 시작한 건, 작년에 아내가 몰던 혼다 CRV 차량을 정비하기 위해 성수역을 다녀오고부터였다. 지하철 사호선 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였다. 사호선은 몇 자리가 비어 있었고 난 오른쪽 어깨와 왼쪽 어깨를 얌전하게 포개여 다소곳하게 앉아 오르한 파묵의 소설을 꺼내 읽었다. 돋보기안경을 꺼내 코에 걸쳤다. 그렇게 두 페이지를 읽었다. 그리고 책을 덮고 가방에 넣었다. 오르한파묵의 소설이 옆자리에서 들려오는 대화에 자리를 내주었다. 코로나이야기와 남편의 건강이야기가 인간극장의 내레이션처럼 들려왔다.
난 그때쯤 안경을 벗고 앞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넌지시 바라보았다. 긴 의자에 어깨와 엉덩이를 다닥다닥 붙이고 앉아있는 사람들을, 마치 노예상인이 노예들을 흘러보듯, 한 사람 한 사람을 스쳐가듯 쳐다보았다. 그들 모두의 시선은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의 탐미적인 순간순간의 시선을 의식하지 못했다. 대부분 검은색 외투와 털모자를 쓰고 있었다.
내 양옆으로 앉아있던 승객들도 두 번이나 바뀌었다. 방이역을 가는 길은 5562번 마을버스와 사호선과 구호선 거기서 오호선으로 환승해야 되는 먼 길이였다. 난 동작역에서 내려 구호선으로 환승하기 위해 사람들을 따라 걸어 나갔다. 구호선은 처음 타보는 거여서 어디로 가야 되는지 알 수 없었다. 한국의 지하철 노선도는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어서, 어디든 대부분 제시간에 갈 수 있는 장점도 있지만, 전화를 건다거나 책을 읽다가 환승역을 지나치거나, 환승역에서 내려서도 반대방향으로 올라타는 경우가 종종 생기게 된다. 그때 아차하고, 스르르 다치는 지하철문을 쳐다보며 소리를 질러봐도 소용이 없다. 그렇다고 마음씨 좋은 기사분이 운전하는 마을버스가 아니기에 다음 역에서 내려 다시 돌아와야 하는 수고스러움을 해야 한다.
난 동작역에서 내려 구호선 환승역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난 그때 꽤나 멋진 풍경을 보게 되었다. 그 풍경을 보고 팔십 년대 홍콩영화에서 자주 봤던 장면이 생각났다. 사호선은 이름이 지하철임에도 불구하고 어찌 된 일인지 지상으로 이어진 역들이 많이 있는데 동작역도 지상으로 연결이 돼 있었다. 동작역에서 구호선 환승역으로 걸어가는 길에 아주 깊은 에스컬레이터를 타게 되는데, 그 깊이와 각도가 너무 깊어서 땅으로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깊은 지하로 들어가는 그 중간쯤에 나의 시선의 높이가 지상의 높이가 교차되는 시점이 나온다.
그건 지상의 세계와 지하의 세계가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지하로 내려가면서 갈라지게 된다. 그건 숙련된 카메라 감독이 움직이는 프레임 속으로 풍경이 들어오는 듯한 착각을 불러왔다. 그건 마치 수영을 하다가 물속으로 들어가는 느낌과 비슷했다. 그렇게 깊은 지하로 에스컬레이터는 수많은 사람들이 서 있는 채로 지상의 세계에서 지하의 세계로 내려가고 있었다.
동작역 밖은 동작대로로 보이는 거리에 차들이 정차되어 있었다. 차가 막혔던지, 신호가 걸렸던지 했던 것 같은데, 나는 그 교차되는 시점이 마치 영화 같아서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끝없이 지하로 연결된 에스컬레이트 위에서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쳐 갔고, 이상할 정도로 앞만 보고 가고 있었다. 마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하얀 토끼를 쫓아가듯이,
가끔씩 이런 낯선 풍경은 시간을 순간으로 만들어 놓는다. 그 짧은 순간은 풍경을 품는다. 한컷의 그림이 되어 나의 시선을 멈추게 한다. 천천히 흐르는 시간 안에 물속에서 들렸던 망막함이 느껴진다.
땅속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는 지상의 세계와 지하의 세계가 교차되는 지평선을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지하를 떠 받치고 있는 땅의 두께를 눈으로 측정해 가며 구호선 환승역으로 내려갔다.
약속이나 한 듯 시끄럽게 들려오는 구두 발자국 소리는 여기가 구호선 환승역이란 걸 알게 해 주었다. 대부분 환승역에서 사람들은 똑같이 분주해진다. 뛰어가며 부딪치고 소리 지른다. 뛰어가는 그들 속에 휩쓸려 구호선으로 갈아탄다.
한 시간 이십 분
방이역 4번 출구
약속시간보다 삼십 분 일찍 도착했다.
역시나 긴 계단과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상의 세계로 올라왔다. 밖은 어느새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