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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의 여인

우연한 만남 이야기

by 둥이

해변의 여인


그날 우연히 미인을 만났다.

미인의 기준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날 차 창 너머에 눈에 띄는 미인이 나타난 것은 사실이었다.

딱히 미인이라고 하기엔 무언가 부족해 보였지만, 그렇다고 미인이 아닌 것도 아니어서 어딜 가나 눈에 뜨일 만큼 이목구비가 또렷해 보이는 여자였다.


미인일 것 같은 여자분을 보게 된 건 어제 오후였다. 그때 난 운전을 하고 있었고, 맞은편 인도로 걸어오는 여자를 보게 되었다.(그건 마치 지루하게 차는 막히고 신호는 바뀌지 않고 시간의 흐름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을 때 누군가 재미있는 무언가를 틀어놓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신기한 일이었다 )


그분은 멀리서 봤을 때 그럴 리 없겠지만 바지를 입고 있지 않은 듯 보였다. (생각 이상으로 너무 짧은 반바지여서 니트단이 아래로 내려와서 바지단을 가린 모습이었다) 매끈하게 쭉 뻗은 하얀 다리살이 얼굴 보다 먼저 눈에 들어왔다. 왜 다리를 먼저 보느냐며 따질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냥 보이는 것이어서, 진화론적 관점으로나, 생태학적 관점으로나, 동물학적 관점으로나 여러모로 수컷의 눈동자는 오래전부터 보이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해 왔었기에, 그게 왜 그런 건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차원으로 설명을 들어보면 그날의 나의 동작은 도덕적으로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음에도 이상하게 꺼림칙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여하튼 그날 나는 인도로 걸어가는 한 여성분을 보게 되었는데, 그분은 긴 생머리를 어깨 아래로 풀어 헤친 체 오른손으로 핸드폰을 잡고 왼손 검지손가락으로 스크롤을 올리고 있었다. 정성 들여 화장을 했는지 멀리서도 짙은 색조의 눈꺼풀이 선명하게 눈에 띄었다.

두 갈래로 갈라진 긴 생머리 사이로 작은 얼굴이 핸드폰을 보며 웃고 있었다. 하얀 얼굴에 선명한 눈코입이 그 작은 얼굴에 다 들어가 있었다. 얼핏 보아도 눈에 뜨일 정도의 미인이었다. 긴팔다리 작은 얼굴 커 보이는 키 멀리서도 눈에 뜨이는 눈부신 비율이었다.


이십 대 초반과 삼십 대 초반까지, 풋풋함과 절정의 건강미가 혼재된, 플롯과 바이올린을 켤 줄 아는, 산악자전거와 요가를 즐기는, 주말에는 성당 미사포를 쓰고 미사를 드리는, 여러 가지 모습들이 생각나게 하는 얼굴이었다. 한마디로 자주 볼 수 없는 매력적인 여자였다. 모르는 일이지만 연예인 지망생이거나 실제로 연예인일 수도 있을 정도로,


그렇다고 그 순간이 시간이 멈추었다든가, 숨도 못 쉴 만큼 이었다든가, 영화에서 처럼 슬로 모션으로 모든 게 느리게 움직이는 그런 긴박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 상황은 그냥 언제나 맞닥트릴 수 있는 일상이었고 순간이었고 하나의 장면이었다. 자주 보게 되는 장면이 아니어서 아쉬울 수는 있어도, 전혀 보지 못하는 상황도 아닌 거여서, 그냥 마음 놓고 아 이 동네에 저런 미인이 있었네 하고 마음껏 감상하면 되는 그런 장면이었다. 감사한 일이지만 말이다.


그 여자분은 엉치뼈가 보일 정도에 흰색 짧은 반바지, 소매 없이 깊게 파인 검은색 브이넥 니트, 검은색 샌들, 한여름 경포대나 해운대 해변가에 어울리는 매력적인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보다 하와이 와이키키 해변에 좀 더 잘 어울려 보였다.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나의 생각이 그렇다는 애기다. 옷차림은 장소에(다세대 주택들이 모여사는 주택가에 이차선 도로 옆 인도) 어울리지 않은 게 흠이라면 흠이었지만, 옷차림 하나로만 본다면 뒤돌아 보게 만들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고민하고 거울 앞에서 여러 옷들을 입어보고 선택한 옷이란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민소매 니트와 짧은 반바지를 고르기까지 여러 벌의 옷들이 헹거에 걸려 있을 거란 생각을 해보았다. 그 정도의 수고쯤은 아까운 게 아닌 것은, 런어웨이 하듯 자신 있게 걸어가는데서 알 수가 있다. 누구에게 보이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저런 모델 같은 자세와 동작으로 기히 하게 걸으면서 핸드폰을 쳐다본다. 45도 각도에서 보아도, 정면으로 보아도, 아마도 내 뒤에서 누군가 그 모습을 본다 해도, 그 여자를 본 사람들이라면, 나처럼 길게 목을 빼고 그 여자를 한참 동안 쳐다보았을 것이다. 난 이 말에 내가 거진 운을 걸 수도 있고 크지 않은 액수의 돈을 판돈으로 걸 수도 있다. 대부분 그런 매력적인 여자를 그냥 스쳐 보낸다는 건 어쩌면 감정이 없다거나, 그보다 더 훔융한 생각으로 마음이 채워졌다던가, 아니면 정말 여자에 관심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옷을 좋아하는 사람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런 저런 여러 가지 이유로 그 여자를 쳐다볼 수밖에 없다. 딱히 이유 없이 쳐다보는 것도 이유 중에 하나여서, 적당한 이유가 없다면 그런 대답을 해도 좋을 것 같았다.


아무렇게나 손 닿는 데로 입었다면 그렇게 매력적인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런 건 쉽게 알 수 있다. 그때 난 운전을 하면서 서서히 옆으로 멀어져 가는 해변의 여인을 쳐다보았다.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이럴 때면 신호가 왜 빨리 바뀌는지, 방금 전까지( 그러니까 그 여자를 보기 전까지는 신호가 매번 걸려 늦게 서행하던) 정체돼 있던 차가 어느새 막힘이 거짓말처럼 풀려 앞으로 속도가 나기 시작했다. 안타깝다면 안따까운 이런 일들은 늘 우리의 바람과는 반대로 일어난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짧은 시간, 해변의 여인은, 해변가의 옷차림을 한 체, 런어웨이 하듯이, 매력을 발산하며 멀어져 갔다.


다시 한번 좀 더 그 모습을 느긋하게 오래도록 볼 수가 없다는 게 안타까웠다. 아쉽지만 또 만나겠지 하는 마음으로 백밀러에서 멀어져 가는 해변의 여인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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