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의바른 진상 손님이 되기 위해서
예의 바른 진상을 부려야 하는 이유
병원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진입로는 꽉 막혀 있었다. 예약된 진료시간이 30분 정도 남은 시간이었다. 인공무릎 수술을 한지 이년이 넘어가고 있지만 엄마는 여전히 진통제를 처방받으러 병원을 가자고 한다. 나이 들수록 챙겨 먹어야 하는 알약들이 늘어만 간다. 왼쪽손바닥 위에 올련 놓은 알약들은 크기도 다르고 색상도 다르고 모양도 달랐지만, 무슨 보약이라도 되는 양 매일 아침저녁으로 약을 먹는다. 밥을 안 먹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하루 일과로 빠져서는 안 되는 알약들이 떨어질 때쯤이면 엄마는 병원에 약 지으러 가자며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를 한다. 아직 한 달 치나 남았는데도, 먹는 사람 입장에선 그게 많아 보이지가 않나 보다. 그렇게 진료 약속을 잡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섰던 병원이었다. 십분 정도 기다렸을까 좀 기다리면 빠지겠지 다른 생각을 하면서 짐짓 느긋한 척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뒷좌석에 앉아있는 엄마는 왜 차가 안 움직이냐며 진료시간이 다 됐다며 다급해하셨다.
딱 그만 때쯤 내 앞으로 주차 관리원으로 보이는 할아버지가 느긋하게 길게 늘어서 있는 차들을 쳐다보았다. 그건 마치 불구경이나 사람구경을 하듯이 무슨 재미있는 거라도 바라보는 듯했다. 난 잠시 생각했다. 진료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달리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난 창문을 열고 목을 길게 빼고 주차 관리인으로 보이는 할아버지를 손짓으로 불렀다.
그리고 최대한 밝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얼마나 수고가 많으시냐며 지금 진료시간이 10분밖에 안 남았는데 차가 언제쯤 빠질 수 있는지, 전혀 기대하지 않은 채 푸념하듯이 말하였다.
할아버지는 두 눈을 말똥말똥 뜨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렇게 몇 마디 나의 말을 신경 써서 들어주지도 않은 채 사라져 버렸다. 그리곤 잠시 후 바로 옆 건물에 막혀있던 주차 차단봉이 스르르 열리고 있었다. 난 그때까지도 그 건물에서 어떤 차량이 나오는 것으로 생각을 했다. 그 순간 주차관리인 할아버지는 손으로 나를 불렀다. 이쪽으로 들어오라며 손짓과 몸짓으로 빨리 들어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내차가 들어간 후에 다시 주차차단봉이 스르르 내려왔다.
그건 알라딘의 요술램프처럼, 막혔던 동굴 입구가 스르르 열리는 것 같은 마법이었다. 만약 그때 내가 마냥 기다렸다면 예약시간에 늦었을 것이고 진료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이런 경험은 늘 한 번씩은 있기 마련이다. 홈쇼핑을 보다가 마음에 들어 생각 없이 주문한 코트가 핏이 좋지 않아 반품해야만 한다거나 8박 9일 해외여행으로 예매한 비행기표를 갑자기 변경해야만 되는 경우들 말이다.
그런 애매한 일도 아니었지만 며칠 전 예매한 항공권을 바로 취소한 적이 있었다. 대부분 24시간 이내 취소한 항공권은 100프로 환불이 가능했다. 하지만 취소한 항공권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환불금액이 0원으로 나왔다. 난 조금 흥분되어 항공권을 담당하는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거의 이틀 동안 난 조목조목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대해서 컴플레인을 했다. 말이 안 되는 상황임을 항공권 판매회사도 알았던 터라 최대한 고객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두세 명의 매니저가 시간 간격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100프로 환불을 해드리겠다는 그 명백하고 간결한 말을 듣기 위해 난 이틀이라는 시간을 전화통을 붙잡고 있었다. 내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담당자들도 설득이 되었던 것인지 모르지만, 하루가 지나갈 때쯤, 내규상 불편을 드리게 됐다며 100프로 환불해주겠다는 답이 왔다. 어찌 보면 그냥 조사해 달라고 기다릴 수도 있었겠지만, 난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마트나 재래시장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제품을 가지고 와서 바꿔달라는 진상고객쯤으로 보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상황과는 말도 안 되는 과실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지라, 난 기다리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 엄포에는 소비자 보호원이나 금융감독원에 신고하겠다는 말도 있었다. 또 그 엄포에는 다시는 그 회사를 이용하지 않겠다는 경고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일까 일주일 걸릴 거라는 그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딱 이틀 만에 모든 게 정리가 되었다. 그것도 이럴 때 당연히 부과되는 수수료 부담도 전혀 없었다.
때론 품위가 없어 보이고, 내가 흥분한다고 바뀌는 게 뭐가 있겠어,라고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적절하고 예의 바른 진상 아닌 진상은 꼭 필요함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일상을 살아가다 보면 한두 번은 원치 않은 진상을 부려야 할 때가 있다. 그건 아주 작고 사소한 일일 수도 있고, 대단히 큰 일일수도 있다. 음식점에서 다른 테이블의 주문한 음식이 먼저 나온다거나 그나마 늦게 나온 음식에 머리카락이 나왔다거나,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시켰는데 차가운 아메리카노가 나왔다든가, 온라인으로 주문한 책상에 스크랫치가 났다든가, 하는 자기감정을 원치 않을 때 발산 해야만 하는 때가 갑자기 퍼붓는 소나기처럼 막 딱 뜨려야 하는 때 말이다.
그때는 무조건 좋은 사람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조금은 예의 바르지 못하고 친절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전화를 끊거나 대화를 나누고 난 후 아 그때 그 우아한 진상 손님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어라는 인상을 주면 그 정도는 그렇게 나쁜 일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나의 소중한 하루를 지켜내야 한다.
그건 어쩌면 아름답고 예의 바른 진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