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 이유
문장이 나를 낚는 순간이 있다.
<"아시다시피 우리는 사람들과 관계를 만들려고 하지요. 이따금 이정표는 없고 넓고 막막한 대지처럼 보이는 이 삶 속에서 모든 도피선과 잃어버린 지평들의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더 이상 무턱대고 항해한다고 느낌을 받지 않기 위해 지표들을 찾고 일종의 토지대장 같은 것을 작성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관계의 실을 잣고 불확실한 만남들을 좀 더 안정적으로 만들고자 한다.">
[파트릭모디아노 -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에서]
새벽공기가 서늘해졌다.
아직은 아니지만 가을이 오고 있다. 보이지 않지만 느낄 수 있다. 얼마 안 가 가을은 채색되어 여름의 흔적을 지울 것이다. 공기의 흐름이 기분을 흔들어 놓는다. 숨 쉬는 것 만으로 보상을 받은 듯하다. 산다는 건 보이지 않은 것들로 위로를 받게 됨을 다시 느낀다. 따스한 햇볕, 시원한 바람 아무것도 아닌 것들로 충만한 치유를 받게 된다. 지금이라는 현실을 달콤하게 만들어 주는 것들이 따로 있지 않다.
요즘 틈틈이 패트릭모디아노의 소설 잃어버린 젊음의 거리을 읽고 있다. 폴오스터의 소설처럼 흡입력이 강하진 않지만, 문체의 유유함이 있다. 뭐라 그럴까 잔잔하면서도 몽롱한 안개 낀 숲 속을 걷는 느낌, 시간의 흐름이 비켜선 거리 그곳에서 화자는 ASMR로 들려주는 것처럼 소곤소곤 말을 걸어온다. 귀에 닿은 음색이 나쁘지 않다. 가끔 졸음이 몰려오기도 하지만, 책을 덮지는 못한다. 감히 그럴 수 없다.
그렇게 한순간에 읽히는 책은 아니지만, 두 세 단락씩 때론 십여 페이지 때론 몇 문장씩 읽어나간다. 화자가 바뀔 때마다 다시 앞페이지로 넘겨 주인공의 이름을 찾아본다. 그리고 스프링노트에 필사를 한다. 130페이지를 넘겼을 때 화자는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 우리는 더 이상 무턱대고 항해한다는 느낌을 받지 않기 위해 지표들을 찾고 일종의 토지대장 같은 것을 작성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관계의 실을 잣고, 불확실한 만남을 좀 더 안정적으로 만들고자 한다."
관계의 이유에 대해서 이것 보다 더 명료한 설명이 있을까 책을 읽다 보면 낚싯바늘에 걸린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문장을 만난다. 작가의 문체 작가의 문장들이 나를 낚는 순간이 온다. 그 문장이 나를 낚는 순간이다. 200 볼트 전류에 감전이라도 된 듯이, 머리카락이 삐죽 솟고 호흡이 빨라진다. 시간이 잠시 자리를 비워주는 순간이, 책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황홀한 풍경을 만나게 된다. 아마도 그래서 책을 읽는지 모른다.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생각을 꽁꽁 묶어두기 위해 단단한 문장과 이야기 속으로 시간의 흐름을 잃어버리기 위해,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처럼 하얀 토끼를 따라 그렇게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지 모른다.
도서관에서 누군가 오른쪽에서 내 옆으로 바짝 다가와 앉았다. 책을 읽기 전 분명 내가 않은 자리 외에도 도서관에는 빈소파와 의자들이 많이 있었음에도 그분은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빅사이즈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오른손에 들고 조심성 이란건 전혀 상관 않는 태도로 내 옆으로 바짝 다가와 앉았다. 만약 내가 그때 패트릭 모디아노의 소설을 읽고 있지 않았더라면 난 분명 벌떡 일어나 그 사람도 의식할 정도의 체스 쳐를 보여가며 (그러니까 이렇게 자리가 많은데로 왜 이 더운 날 제 옆에 앉으시는 건가요 물어볼듯한 자세로) 다른 의자에 가서 앉았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분이 내게 다가오는 순간 그분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오히려 어서 오세요 이렇게 많은 빈자리가 있는데도 제 옆자리에 앉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란 느낌이 갈 수 있게끔 공손한 태도로) 어깻짓도 하지 않은 채 책을 읽어 내려갔다. 그런 태도가 그분을 의식했다거나 혹은 그게 도서관에 예의라서는 절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그런 나의 동작은 패트릭모디아노의 문장이 나를 낚아낸 지 얼마 안 되는 순간 이어서 인지 모른다. 아니 거의 그 말이 맞을 것이다. 난 그만큼 상대방을 배려한다거나 예의가 좋은 편은 아니다. 나의 이런 행동은 도서관이나 지하철이나 사람들이 붐비는 여러 장소에서 상대방의 땀냄새가 느껴질 정도로 가깝게 밀착된 곳에서도, 짜증을 낸다거나 왜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거야 시간은 왜 이리 안 가는 거야 라는 불평을 할 수없게 만든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이미 내 생각은 그런 주변의 혼잡함에서 달아나 패트릭모니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어디쯤을 거닐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실의 단단함은 어느새 달콤한 시간들로 채워져 간다.
책은 단단한 현실을 잊게 해 준다. 달콤한 쵸쿄릿 한 조각이 스며들듯 시간은 행복으로 촘촘하게 정렬되어 간다.
낚시를 좋아하진 않지만, 문장들에 낚이는 그 순간이, 숨 막히는 고요함이, 감전의 짜릿함이, 나를 계속 낚이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