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커스

일상 이야기 - 기억의 소환

by 둥이


8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회색 후드티를 입은 여학생이 까만 가방을 어깨에 메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이미 엘리베이터 안은 대여섯 명 정도 서있었던 터라 백팩을 뒤로맨 여학생이 비집고 들어오자 엘리베이터 안은 만원이 되었다.


9월인데도 날씨는 무더웠고, 후드티를 입은 여학생은 더워 보였다. 내 앞까지 밀고 들어온 여학생은 미안했던지 나를 보고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인사라고 하기엔 좀 부족해 보였지만 그렇게라도 백팩을 메고 밀고 들어온 것에 미안함 마음을 보이고 싶어 보였다. 나는 가볍게 학생의 미소에 화답하듯 눈썹을 위로 올리며 괜찮다고 뒷걸음질 쳤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단정한 단발머리, 뚜렷한 이목구미, 한쪽머리를 귀뒤로 걸쳐 얼굴윤곽과 목선이 선명하게 보였다. 전체적으로 비율이 좋아 보였다. 작은 얼굴 긴 팔다리 후드티 밑으로 두 단 정도 말아 올린 것 같은 교복치마 그래서인지 다리가 더 길어 보였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사람을 그렇게 까지 훌터보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람의 인상은 일이 초만으로 알 수가 있다. 그것도 어깨가 맞닿을 정도로 붙어있는 엘리베이터 안이라면, 그 사람이 마침 외계인처럼 비율이 좋은 사람이라면,


그때였다. 내 앞에 바짝 서있던 여학생이 팔을 뒤로 뻗었다.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려는 듯 보였다.

그 여학생은 가제트 형사처럼 오른팔을 뒤로 뻗어 백팩 지퍼를 열었다. 나는 바로 뒤에서 그 아이의 오른손이 가방 뒤로 넘어오고 있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여학생은 오른손 손가락 만으로 백팩의 지퍼를 열고 얇은 빗을 꺼냈다. 어떻게 오른손만 뒤로 뻗어서 지퍼를 열 수가 있었는지, 눈앞에서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부드러운 손동작이 오랫동안 연습한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한 번쯤 우리가 늘 그랬던 것처럼, 백팩의 지퍼위치를 찾느라 더듬거릴 법도 할 텐데, 자석에 이끌리듯 정확한 위치로 손가락이 이동해 왼쪽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지퍼를 열고 하얀 빗을 꺼내 들었다. 마치 공항 마약탐지견이 마약을 찾아내듯이,


얼마나 연습을 한 걸까 아니면 그냥 그렇게 마음만 먹으면 가방에서 무엇이라도 꺼낼 수 있는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그 나이 때는 그게 그리 신기한 일도 아닌 걸까 여러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백팩의 지퍼를 그렇게 열러면 지퍼방향으로 가방이 쏠리거나 지퍼단에 걸려 몇 번은 멈칫멈칫해야 되는 게 정상으로 보였지만, 팔을 뒤로 뻗어 지퍼를 열고 빗을 꺼내기까지의 매끄러운 동작은, 마치 올림픽 기계체조에서 세 바퀴 반의 평점 높은 동작을 완벽하게 마무리한 선수처럼 보였다.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보통의 사람이라면 백팩 안에 들어있는 무언가를 꺼내려면 백팩을 앞으로 돌려 매거나 아니면 한쪽 어깨를 풀어 가방을 옆으로 이동시켜 지퍼를 여는 게 순서처럼 보였지만, 후드티 여학생은 아무 동작을 하지 않은 채 오른손만 가볍게 뒤로 돌려 원하는 소지품을 꺼냈다.


그 순간 난 어렸을 적 봤던 서커스가 생각났다. 몸을 기이하게 꺾어 사이즈가 작은 통속으로 들어가는 그 묘한 장면이, 팔을 뒤로 뻗어 백팩의 지퍼를 열고 얇은 빗을 꺼내는 여학생을 보면서, 기억 속 어딘가에서 소환되었다. 기억이란 늘 없는 듯 표피처럼 붙어있다가, 이렇게 불현듯 찾아온다. 친하지도 않았던 동네 친구의 이름이, 저녁밥을 먹다가 갑자기 생각나듯이,

거기에 납득할만한 이유는 없다.


왜 서커스가 생각이 났던 걸까?

아마도 백팩에서 무언가를 꺼내려는 동작이 오랜 시간 연습한 군무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부드럽게 이어지는 게 신기해 보였을 수도 있다.


그것도 아주 작은 하얀 빗이었다.

여학생은 앞머리가 충분히 가지런했음에도, 하얀 빗으로 앞머리를 여러 번 빗어내렸다. 일층까지 내려가면서, 일층에 내려서 버스정거장으로 걸어갈 때 까지도,

그 여학생은 앞머리를 빗고 또 빗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