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겨울에 무릎 관절 수술을 하신 엄마는 여름 가까이 돼서야 조금씩 움직일 수 있었다 한 달에 한번 병원을 다녀와야 하는 수고스러움과 자식에 대한 미안함 마음을 자주 넋두리 하곤 하신다 병원을 다녀오는 차 안에서 줄곧 엄마는 예전 살아왔던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 둘째야
먹고살기 힘들어도 젊고 팔팔했던 그때가 그립구나 그때 네가 여서 일곱 살은 되었을 거야
그때 네가 엄마 마음을 아프게 했던 말이 지금도 생각난다 "
"엄마 우리도 한 밥 먹자 김도 먹자 선호네는 흰밥만 먹어"
그 당시 사는 형편이 넉넉지 못한 탓에 자식들 먹이는 것 입히는 것 교육시키는 것 모하나 제대로 해주지 못한 한이 한편에 쌓여 있으신 듯 ᆢ 끼니조차 제대로 못해 먹인 아픈 기억이 엄마의 목울대를 갈라지게 했다
"한 번은 니 누나가 울면서 집으로 들어왔지 모냐 너네 삼 남매가 고만고만하게 태어난지라 니들 키우는 게여간 힘든 게 아니었어ᆢ 아랫집 선호네가 동네에서도 알아주는 부자였잖냐.. 집집마다 텔레비전 있는 집이 손에 꼽혔었는데 그 집 둘째가 너랑 형만 텔레비전 보라고 하고 니 누나는 들어오지 말라고 했다잖아 꺼이꺼이 우는 내 새끼를 달래느라 움켜 잡고 울면서 엉덩이를 때렸는데 ᆢ 지금도 자주 생각이 나지 모냐"
" 모내기를 끝내놓고 니 아버지가 그해 연탄보일러를 놓고 수리해 주는 일솜씨 좋은 걸로 동네에 소문이 나서 고매리 그 많던 집들 일을 도맡아 했던 덕에 꽤 많은 돈을 번 적이 있었어 ᆢ
그날 저녁에 니 아버지한테 조용히 말했다 ᆢ 아랫집 텔레비전 이야기를 하면서 끼니를 굶더라도 자식들이 아랫집 아들놈 눈치 보고 울고 들어 오는 거 더 이상 못 보겠어요 내일 나가서 좋은 걸로 사 옵시다 "
"아니 갑자기 웬 텔레비전 타령이야 " 하면서 끼니 걱정을 하시던 니 아버지도 자식들 주눅 드는 게 싫었던지 ᆢ바로 가자고 하더구나
"너네들 내일 집 잘 지키고 있어라 내일 엄마 아빠 시장 나갔다 올 거니까"
그렇게 흑백텔레비전은 네모단 미닫이 문이 달려있는 가구 속에 보물처럼 갇힌 체 안방 한구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온 동네가 떠나가라 소리소리 지르며 삼 형제는 자랑을 하러 다녔고 동네에서 몇 안 되는 텔레비전 있는 집으로 대접받게 되었다
"양미야 연중아 저녁 먹어라 "
저녁밥을 짓기 시작할 때쯤 피어오르던 온 동네 굴뚝 굴뚝에 푸른 연기들 ᆢ
끼니때를 잊은 채 네모난 텔레비전 상자 앞으로 다닥다닥 붙어 눈을 떼지 못했던 여나무명의 동네 아이들 ᆢ더 이상 아랫집 선호네 집은 아이들이 드다 들지를 않았다 지금이나 그때나 동네에서 인심 좋고 사람 좋기로 동네 아주머니들의 마실이 끝히지 않았던 가난했던 우리 엄마는 자기 가난으로 더 가난한 이웃들을 품고 기대고 어울였었기에 아이들을 가라 쫓아 내는 법이 없었다
모여든 아이들의 저녁 끼니를 입속으로 밀어 넣었고 꾸벅꾸벅 잠을 못 이겨 초저녁잠을 이룰 때쯤이면 아이들의 엄마들은 아이들을 찾으러 우리 집 대문을 여시곤들 하셨다
" 너 경수 엄마 알지"
"그럼요 왜 매해 김장 하러 오시던데 요 몇 년 안보이시네요"
"삼 년 전에 암으로 죽었어 ᆢ 그 마누라 죽었다는 소식 듣고 저 아래 주호엄마 혜경이 엄마랑 장례식장 가서 참 많이 울었다 그렇게 가버려서 서럽고 보고 싶고 가난해도 그때나 지금이나 서로 비비며 들여다보며 안부 전하고 살았는데 ᆢ죽기 전에 병문환 가서도 서로 오래 살자고 눈물 훔쳤는데 ᆢᆢ "
"내가 우니 그 집 아들 경수 경진이가 따라 울더라 자기 엄마랑 그렇게 친하게 지냈던 거를 아니까 자기들을 내 새끼처럼 쳐다보고 층 안가게 돌봐준 걸 아니까 운다고 하더라 ᆢ개들이 지 엄마죽고 여기가 고향이라 일 년에 한 번씩은 꼭 들리더라 오고 가며 인사 왔다고 ᆢ주호네 갔다가 우리 집으로 인사오더라 ᆢ그래 갸들도 나는 층 안가게 밥 먹였어 같이 없는 집들이여서 더 그랜던가벼 "
그 시절 엄마 아빠가 겪었던 가난은 우리가 기억하는 가난과는 그 궤가 같지 않음을 가끔 느낀다 아버지가 손수 지었던 우리 집은 집 앞으로 계단식 논이 펼쳐져 있었고 작은 개천과 사과나무 대추나무 밤나무가 집 주변으로 이어져 있었다
박경리 작가의 토지에 나오는 글귀처럼
가난과 굶주림은 열사람이 온 동네가 다 굶으면 허기짐을 모르다가도 어느 한집 밥 짓는 퍼런연기가 굴뚝에 피어오르면 그때서야 어기 없이 찾아오는 살고자 하는 본능이었다
동네 아이들에게 시네마천국을 만들어 주셨던 엄마의 가난한 마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고향을 잊지 못하고 찾아들게 하는 애틋한 향수였으리라 내 기억 속에도 ᆢ내 친구 양미의 기억 속에도
이름을 대라면 줄지어 여나무명도 족히 넘었던 동네 꼬마 아이들의 기억 속에서 네모난 흑백텔레비전은 꺼지지 않을 보물상자였을 거라 ᆢ
"목수일을 하셨던 터라 아버지는 일솜씨가 좋으셨고 지금 사시는 집까지 손수 지으셨다 그 부지런함이 질곡 많은 세월을 견뎌내게 해 주었고 사형제를 길러낼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런 아버지가 3층 높이에서 떨어져서 근 일 년을 누워 있었던 때가 있었다고 한다
"니 아버지 누워 있을 때 ᆢ내가 동네 엄마들하고 나무를 하러 다녔어ᆢ 땔 나무가 있어야 밥도 짓고 방에 군불이라도 집혀야 되니 힘들어도 나갔었지 근데 그게 해보다 보니 재밌더라고 나무 욕심이 생겼지 모냐ᆢ
너네 삼 남매가 학교 갔다 오면 어리 꿀로 나무하러 간 엄마를 찾아와서는 한놈은 갈퀴를 한놈은 낮을 잡고 도와준다며 나무하는 시늉을 하면 동네 엄마들이 효자 났다고 떠들곤 했는데 기억나냐 "
"어렴풋이요"
"해질 때쯤 집으러 가는 발걸음이 행복해서 아이들이 옆으로 발맞쳐 띰 박질 하던 게 기억나요"
집 앞 계단식 논, 겨울이면 논 위에서 썰매를 타고 공놀이를 하고 연을 날리고 자치기를 하고 말뚝박기를 했던 그곳 ᆢ마을 한가운데를 흐르던 동네 냇가, 여름이면 미역 감고 빨래하고 가재 잡고 겨울이면 썰매 타고 아이스하키하고 쥐불놀이 했던 그곳 또래 동네 아이들이 무리 지어 몰려다녔던 모두가 가난했던 행복했던 그곳 ᆢ
나의 유년 시절이 스며 있는 고향땅은 우리에겐 시네마천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