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이 가지고 있는 재료에 대한 믿음
일반 식당에 가면 본 요리에 집중하고 밑반찬은 거들기만 한다.
음식 가격이 싼 음식점일수록 밑반찬은 그야말로 걸인의 찬이다. 저렴한 가격에 밑반찬을 많이 내어 놓으면 가격 수지가 안 맞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격이 제법 되는 일식집이나 한정식집은 그야말로 진수성찬을 받아먹을 수 있다. 본 요리가 나오기 전 식탁 위에 가지런히 정렬해서 내어 놓는 밑반찬을 보고 있노라면 절로 흐뭇한 미소가 만발하게 되고, 각양각색의 산해진미로부터 뿜어져 나와 실내를 가득 메우는 음씩 향을 비강을 통해 맛보고 있노라면 어느덧 살아있음에 감사하게 된다.
지난주에 온 가족은 저녁 메뉴 선정을 놓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최근에 입맛이 없어 음식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아빠와 요리가 귀찮은 엄마, 음식 자체에 관심이 없는 우리 아이들 사이에 한 가지 메뉴를 고르기란 쉽지 않다. 콩나물국밥, 돼지국밥, 갈비탕, 삼겹살 등 몇 가지를 제안해 보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시큰둥했다. 한 사람이 찬성하면 다른 한 사람이 난색을 표하는 분위기 속에서 메뉴 선정은 그야말로 고역이다. 포기하는 심정으로 중식을 던져봤다. 덥석! 미끼를 물어버리는 가족. 그래, 가자... 중국집으로.
우리 동네에 나름 유명한 중식집이 있다. 갈 때마다 웨이팅을 해야 하지만 회전이 빨라서 조금만 기다리면 들어갈 수 있다. 유명 야구선수인 추신수 씨와 사장님이 함께 찍은 사진이 벽에 걸려 있다. 유명 음식점에 가면 연예인이나 유력한 방송인들의 사진과 사인들이 잔뜩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지만 이곳은 그런 장식들이 없어도 알음알음으로 유명해진 곳이다. 특히 이곳은 '짜사이'가 맛나기로 유명하다. 나도 이 짜사이를 맛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자주 이곳을 이용한다. '자차이'라고 하는 중국의 절임 음식에서 파생된 종류이지만 보통 짜사이라고 하면 오이절임과 양파, 파 등으로 묻혀서 나오는 밑반찬 종류의 하나를 말한다.
이 음식점의 짜사이는 오이의 아삭함과 양파의 알싸함, 그리고 중국 향신료 특유의 미향이 어우러져 씹는 순간 김치보다 순하고 오이피클보다 진한 맛을 느낄 수 있어, 짜사이 하나로도 당당히 밑반찬 하나의 몫을 감당해 낸다. 그래서 그런지 밑반찬 코너에서 무한리필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반찬들보다는 유독 이 짜사이만 항상 동이 난다. 아마 우리 와이프와 내가 3 접시 이상을 먹어치워서 그런가 보다. 맛있는 걸 어찌하오리.
밑반찬 하면 역시 일식집과 고깃집이 단연 압권일 것이다. 일식집에 가면 흔히 '스끼다시'라고 하는 밑반찬들이 본 요리보다 먼저 나와서 손님들의 뱃속을 만족시킨다. 처음 방문한 손님은 수많은 종류의 밑반찬에 정신을 빼앗기게 되고 이것저것 주워 먹다 보면 본 요리가 나올 때 즈음에는 이미 젓가락을 놓은 상태가 된다.
유명 고깃집은 또 어떤가? 고기로 유명한 음식점에 가보면 일반 음식점에서는 볼 수 없는 온갖 산해진미가 밑반찬으로 나와서 어르신들을 시각적, 촉각적으로 모두 만족시킨다. 더덕구이, 간장게장, 전복구이, 육회 등은 여타의 음식점에서는 메인 요리로 등장하는 메뉴들이다. 가끔 운 좋으면 장뇌삼 무침 요리도 나온다. 고기 먹으러 왔다가 산삼을 먹게 되는 득템의 경험을 할 수 있다.
드라마에서도 주인공이 주목을 받고 또 주인공의 인물이 조연보다 좋기도 하다. 드라마가 인기를 구가하면 대부분 주인공과 주인공 역을 맡은 인물에게 인터뷰나 광고 섭외들이 많이 들어오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에 주연의 슬픈 스토리가 존재한다. 주연은 특유의 캐릭터 성격으로 인해 차기작을 선정할 때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보통 한 영화나 드라마에서 큰 인기를 누리게 되면 그 프로그램에서 맡은 캐릭터가 본인의 캐릭터가 되어버리는 현상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로 인해 후속 작품을 잘 못 선정하게 되면 그 사람은 이후 인기가 바닥을 찍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되고, 이로 인해 조용히 세간의 이목에서 멀어지게 된다. 가요계로 말하면 '원 히트 원더(One Hit Wonder, 가수가 부른 곡 중 단 한 곡이 대 히트를 치는 경우)'인 경우에 해당하며 연기자로서의 커리어를 그렇게 마감하게 되는 것이다.
조연의 경우는 다르다. 여러 작품에 겹쳐서 출연을 해도 주연이 아닌 이상 큰 주목을 못 받기 때문에 주연에 비해 배우로서의 수명이 길다. 조연의 역할은 주연을 빛나게 해 주는 것이다. 그러다 가끔 개그스럽거나 맛깔난 연기로 인해 주연보다 더 주목을 받는 역할(신 스틸러, Scene-stealer)을 해 내기도 한다. 성동일 씨나, 고창석 씨, 라미란 씨, 그리고 유해진 씨 등이 그 유명한 예라고 볼 수 있다. 음식으로 따지면 메인 요리를 빛나게 해주는 것을 넘어서는 밑반찬들이라 하겠다. 가끔 밑반찬이 너무 잘 나가서 메인 요리로 데뷔하기도 한다. 더덕 반찬이 더덕구이 전문점에서 맹활약하고, 만년 밑반찬의 터줏대감인 김치가 오모가리 찌개 전문점을 통해 화려한 데뷔를 하기도 한다.
나는 주목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밑반찬처럼 메인 요리를 빛나게 해 주고 주위의 밑반찬들과 어우러져 시너지 효과를 내는 역할을 선호한다. 밑반찬이 맛있으면 손님들이 기분이 좋아지고 이어서 나오는 메인 요리를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해준다. 밑반찬의 질이 좋으면 메인 요리도 평가가 좋아지는 계기가 된다. 하지만 영화나 드라마를 오래 볼수록 조연의 진가를 알아볼 수 있듯이, 유명한 음식점을 빛나게 만드는 것도 알고 보면 밑반찬의 역할이 크다 할 수 있다.
나도 이런 밑반찬의 삶을 살고 싶다. 메인 요리의 역할이 아니면 어떠랴. 존재감만으로도 듬직한 밑반찬으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다면 이 또한 가치 있는 삶일 것이다. 모든 사람이 주연일 수는 없다. 다만 어느 상황에서든 주연을 빛나게 도움을 주면서도 주연과 오랫동안 동행할 수 있다. 차승원 씨와 이해진 씨와의 관계가 좋은 예가 아닐까 한다. 영화 속에서는 차승원 씨가 더 주목을 받을 수는 있어도 현실에서 유해진 씨는 차승원 씨에게 있어 둘도 없는 친구이자 인생의 동반자이다. 차승원이라는 메인 메뉴에 가장 잘 어울리는 밑반찬은 단연 유해진일 것이다.
메인 메뉴를 오랫동안 사랑받도록 만들어주는 존재, 그것이 밑반찬이다.
조물주가 보기에는 메인 요리도, 밑반찬도 모두 중요한 존재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해내기 위해 캐스팅된 존재일 뿐. '그 나물에 그 밥'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길을 성실하고 꾸준하게 걸어가야 하겠다. 그 누가 조물주의 뜻을 알겠는가? 스스로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밑반찬도 메인 메뉴로서 캐스팅될 수 있다.
각자가 가진 자신만의 재료를 잘 활용하여 보기에도 좋고 맛도 좋은 밑반찬을 만들어 보면 좋겠다.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신선한 재료를 믿어보자. 매번 최선을 다하고 진심으로 임할 수 있다면, 적어도 이 인생 여정의 끝에서 한 마디 정도는 자랑스레 할 수 있을 것이다.
"내 밑반찬도 제법 맛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