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존재
오랜만에 친정 직장에 다녀왔다.
이미 떠난 직장에 왜 다시 가냐고 하겠지만, 이 바닥 생리가 원래 다 그렇다.
정부 사업을 대행하고 있는 기관끼리는 서로 업무 연계가 되어 있기에 언젠가는 꼭 한 번 마주치게 되어 있다.
최근 신규과제가 주어졌다.
도통 모르는 새로운 과제였기에 어딘가로부터 업무를 배워와야 했다.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이미 과제를 시행해 본 경험이 있으면서 친절하고 자세히 잘 가르쳐 줄 수 있는 곳은 어딜까?
몇 군데 선정하여 전화로 먼저 확인해 보니 역시나... 친정만 한 곳이 없었다. 더구나 재직 시절 내가 제일 존경하고 좋아했던 분이 부서장으로 와 계셨다.
얼른 전화를 했다. 역시나 반갑게 맞아주시는 분.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무조건 오케이! 바로 오라고 하신다.
몇 가지 선물을 챙겨 방문을 했다. 친정에 가까워질수록 만감이 교차했다. 비록 어려운 사정으로 인해 그곳을 나와야 했지만 여전히 그곳은 나의 최고의 직장이었고 애환이 서린 곳이다. 생각할 때마다 아픈 손가락처럼 마음이 아려온다.
떠난 지 10년 만에 방문하는 친정 직장이다.
굳은 마음으로 본 사옥으로 들어섰다. 이전 같으면 아무런 문제 없이 게이트를 통과했으나 지금은 이방인이자 외지인. 건물 입구부터 막혔다.
방문 목적을 말씀드리고 허가를 받아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해당 층을 눌렀다.
중간에 남자 두 사람이 탔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한 사람은 마스크를 안 써서 금방 얼굴을 알아챘다. 그러나 아는 체를 할 수 없었다. 다른 한 사람은 마스크를 써서 못 알아봤다. 해당 층에 도착하여 내리려 하자 한 사람이 나에게 묻는다.
"잘 지냈어? 기억을 못 하나 보네."
"아... 네, 마스크를 쓰니 잘 못 알아보겠네요."
사실 내리면서도 누군지 몰랐다.
몇 걸음 걸어가지 못해 기억이 되살아났다.
내가 견디기 힘들어 퇴사를 결심하고 마지막 인사 차 연락드렸을 때, 전화를 피했던 사람.
자신에게 뭔가 부담이라도 지울까 봐 정색하고 거리를 두었던 그 사람이다.
과연 내가 반가웠을까? 나에게 미안한 마음은 없었을까?
심란한 마음으로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그분이 먼저 나와 환한 얼굴로 맞아주셨다. 반가운 마음과 더불어 빠르게 긴장이 풀렸다. 마치 적진 속의 아군처럼 그분이 서 있었고 순식간에 분위기를 반전시켜 주셨다. 언제 어디서든 만나면 위로가 뒤고 힘이 되어주신 분, 그분이 있는 곳이라면 언제나 함께 하고 싶었다. 나보다 항상 더 높은 위치에 계신 분이셨는데 이렇게 같은 위치에서 만나게 되니 기분이 묘하고 어색했다.
티타임을 가지는 짧은 시간 동안 10년간의 날들을 서로 회상하고 상기시켜주다 보니 마치 엊그제 뵙고 또 뵙는 착각을 하게 되었다. 이 분은 그런 분이셨다는 것을 그간 잊고 있었다. 60이 가까우신 분이신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눈빛이 맑고 얼굴엔 항상 밝은 웃음이 떠나지 않는 분. 만나는 상대방을 항상 기분 좋게 만들고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상대방을 항상 치켜세워주시는 분. 그렇기에 항상 곁에 모시고 함께 일하고 싶은 분이셨는데...
밝은 미소에도 불구하고 얼굴이 많이 상해있었다. 이유를 여쭈니 최근 몇 년간 많이 힘드셨다고 한다. 이전 기관장과 뜻이 맞지 않은 까닭에 억울한 누명도 쓰고 조사도 받았다고 한다. 이유 없이 좌천도 당하고 한직으로 물러나 계시다가 최근에서야 중앙으로 복귀하셨다고.
특유의 느긋하고 낙천적인 성격 덕에 버티신 게 아닐까 추측해 본다.
회의가 끝나고 점심을 사주셨다.
오랜만에 산해진미를 맛보았다.
음식에 곁들여 이것저것 이야기하다 보니 순식간에 1시간 반이 지나가 버렸다.
그냥 헤어지기 아쉬워 커피를 마시러 갔다. 근사한 분위기의 카페를 소개해 주셨다.
경탄할 정도로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곳에 위치한 카페였다. 갑자기 내 마음속에서 소년스러움이 솟아나 카메라로 이 멋진 뷰를 마구 담고 싶었으나, 오랜만에 만난 자리에서 잔망스러움을 보여드릴 수 없어 힘들게 참아야 했다. 10년 전처럼 밝고 유쾌한 나를 기대했을 수도 있겠지만 내 나이도 있고 주위 사람들을 의식해서인지 꾹꾹 참았다. 사실 좀 아쉬웠다.
커피와 다과를 차려 놓고 10년 만에 제대로 된 썰을 풀기 시작했다. 이야기의 시작은 10년 전 내가 이곳에서 재직할 당시 직장 동료들의 에피소드부터 최근 친정에서 터졌던 사건 사고, 최근 직원들의 이야기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곳저곳을 마구 누비고 다녔다. 남자들도 입이 트이면 아줌마를 능가할 수 있음을 오늘 확실히 깨달았다. 자세한 이야기는 전화로 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넘어감을 확인한 후에야 이별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서로 못내 아쉬워하는 눈빛을 애써 외면하며 각자의 차를 타고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달렸다.
친정이 서서히 멀어진다.
그런데 이상했다. 오기 전까지 가졌던 굳은 마음과 심란한 분위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오히려 홀가분하고 유쾌한 기분이 내 속을 채워 놓았다.
다시는 오고 싶지 않았던 곳. 모든 애증과 아픔, 미움조차도 되새기고 싶지 않았던 곳.
군대로 말하면 전역 후 복무지를 향해 오줌도 누지 않는다는 곳. 바로 그곳이었는데, 보고 싶었던 그 한 분으로 인해 다시 돌아오고야 말았다.
만날 사람은 결국 만나게 된다.
보고 싶은 사람은 죽기 전에 꼭 한 번은 다시 만나야 한다. 그 사람을 만나야만 생기가 회복되고 죽어있던 세포가 되살아난다.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이 있고, 생각만 해도 그리운 사람이 있다.
갑자기 생각나서 수년 만에 뜬금없이 연락해도 반가운 사람. 그 사람을 오늘 만나고 왔다.
친정에서 멀어져도 기분은 한없이 좋았다. 곧 다시 만날 약속을 잡았기 때문이다.
"조만간 또 보자고."
보통 남자들이 헤어질 때 의미 없이 던지는 말이지만, 오늘 우리의 이별사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내 마음이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만날 때 그분의 얼굴이 완전히 회복되길 바란다. 그리고 다시 만났을 때 또 한 번의 악수가 서로에게 삶의 원기를 회복시켜 주는 촉발제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누군가에게 힘과 에너지가 될 수 있는 존재, 그런 존재로 성장할 수 있기를 오늘도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