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길 수 있는 기쁨
아내가 처음 캘리그래피를 배운다고 한 것이 바로 몇 주 전 같은데 벌써 7개월이 되어 간다.
작년 뜨거운 여름의 끝자락에 캘리그래피를 배워 보겠다고 걸어서 30분이 넘는 거리를 매주 다닐 때만 해도 저러다 며칠 못 가 그만두려니 했다. 날도 날인 데다가 한두 달 배워서 이룰 수 있는 경지가 아니라 싶었기 때문이다. 이웃분들 중에 캘리그래피를 한다고 하시는 분들의 글씨를 보면 정말 멋지다는 생각을 했지만 정작 우리 와이프가 캘리를 한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선뜻 응원해 주고 싶지가 않았다. 본인이 열의를 보였기에 남편 된 입장에서 응원을 해주는 게 다였다.
그렇게 한 달, 두 달을 채워가더니 벌써 7개월째 다니고 있다.
최초 과정은 강사 선생님께서 프린트로 내어주시는 글씨 교본을 따라 써 내려가는 것이었다. 한글 워드 글씨체 중에 하나랑 비슷한 글씨여서 굳이 몇 번씩 따라 써가는 모습이 그리 새롭게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가방 속에 교본이랑 글씨 연습한 것들 몇 개랑 펜이 다였다. 그런데 달이 지날수록 종이의 종류도 달라지더니 어느 날부터는 펜의 종류도 다양해지고, 붓도 많아졌다. 또 어느 날부터는 지우개를 파겠다고 인터넷으로 주문을 해서 지우개를 왕창 모아놓았다. 더하여 화선지 꾸러미도 사고 벼룩, 묵, 바닥 받침대까지 풀세트로 구비하여 놓으니 거의 전문가 같았다.
3개월째 되더니 선생님께서 주목을 하셨나 보다. 1년 이상을 다닌 수강생들 수준으로 올라섰다는 강사 선생님의 칭찬을 듣고 으쓱해져서 더욱 즐거워했다. 와이프는 시간이 날 때마다 글씨에 집중을 하기 시작했다. 가끔씩 글씨의 모양을 연구하기도 하고 선생님의 글씨와 비교도 하면서 몰입하는 아내의 얼굴에는 살짝 흥분된 모습도 보였다.
그녀는 진정으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평소 아이들과 집안 살림에 힘들어하던 모습도 캘리그래피를 배우고 온 날에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오늘은 지우개를 팠는데 선생님과 수강생 동료들이 너무 잘 팠다며 폭풍 칭찬을 해 주더라면서 여학생처럼 즐거워했다. 그러더니 가방에서 상자를 꺼내어 뚜껑을 열어 안에 있던 지우개들을 보여 주었는데, 그곳에는 꽃 모양, 물고기 모양, 항아리 모양 등 다양한 형태의 문양들이 즐비했다. 나중에는 자기 이름이 새겨진 지우개도 보여 주었다. 글씨를 다 쓰고 나면 위아래에다가 찍어서 자신의 글씨임을 증명하는 용도로 쓰기도 한다고 했다.
오랜만에 아내의 얼굴에서 꿈 많은 소녀의 모습을 본다. 얼굴에 '행복'이라는 글자를 새겨 놓은 듯, 캘리그래피를 연습하는 와이프의 모습에서 '열정'과 '놀이'라는 단어가 공존함을 느낄 수 있다. 놀면서 배우는 공부가 재미있듯이, 즐기면서 하는 일은 빠른 실력 향상이라는 결과를 낳게 된다. 성실함도 중요하지만 즐기면서 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오래, 가장 멀리 가는 비결이다.
전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인 빌 게이츠도 자신이 좋아하는 컴퓨터 관련 일을 하다 보니 날이 가는 줄 몰라했다. 그리고 좋아하는 일을 꾸준히 해 내다보니 부와 성공도 함께 와 주었다고 한다. 메타의 마크 저커버그나 구글의 레리 페이지, 네이버의 이해진 창업자도 모두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고 즐긴 사람들이다.
억지로 하는 일들은 오래가지 못한다. 그렇다고 모든 일을 즐기면서 할 수도 없는 일이다. 내가 블로그와 노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았다면 아마 나도 평소처럼 일주일도 안 되어 그만두었을 것이다. 나이가 들고 자신의 분야에서 어느 정도 위치에 서게 되었다면 굳이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지 않을 만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간 자신이 일구어 왔던 분야가 아닌 전혀 다른 분야를 도전하는 사람들이 있다. 힘들지 않을까 하고 의아해할 만도 하지만, 조금만 더 알아보면 그분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고 또 그 도전을 즐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내의 캘리그래피 속에서, 그간 그녀가 힘든 환경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이 일을 즐기고 사랑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우울할 때나 힘들 때나 상관없이 그녀는 묵묵히 자신이 하는 일을 불평 없이 사랑했다. 자신이 쓴 글씨를 들고 와서 수줍게 나의 평가를 바라는 그 눈빛을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잘 쓴 것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칭찬을 해 준다. 그렇지만 글씨 연습을 게을리한 날에는 그 결과도 썩 좋지는 않아 보인다. 하지만 난 믿는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즐기며 나아가는 한, 아내는 누구보다 더 빠른 성취를 이룰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사람마다 자신이 좋아하고 또 잘하는 분야가 있다. 살림살이가 벅차다는 이유로, 혹은 직장 생활이 힘들다는 이유로 하고 싶은 일들을 미루고 있는 많은 이웃분들께 용기를 드리고 싶다. 뭐든 좋으니 오늘부터라도 자신이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미루지 말고 당장 시작하시라고 말이다. 오늘 시작하는 사람과 내일 시작하는 사람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을 수 있다. 하지만 오늘 시작하는 사람과 1년 뒤에 시작하는 사람 사이에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차이가 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주저하지 말고 오늘 바로 시작하시길 바란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은 시작하는 사람에게만 효과가 나타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