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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황해볼게요 Aug 19. 2024

특별하지 않은 순간에 입꼬리를 올려보는 거

Day11 Camino de Santiago

 해가 뜨기 전 숙소를 나선다. 보슬비가 내린다. 팜플로나에서 구매한 판초 우의를 입는다. 오늘에서야 360g 되는 그것을 이고 온 보람을 느낀다.

 날이 밝아오기 시작하면서 어둠 속에 모습을 감추었던 능선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안개 자욱한 새벽에 마주할 수 있는 장관이다.


 귀여운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모르지만 알 것만 같은 그것이 그 공간을 이쁜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게르니카에서 카페에 들렀다. 바게트와 하몽, 카페라테와 카푸치노를 주문했다. 6유로를 계산했다. 바게트는 구워서 올리브오일과 함께 주셨다. 가격이 지나치게 착했다. 깨와 견과류가 토핑 된 바게트를 따듯하게 구워냈으니 당연하게도 맛있었다. 바삭한 식감과 토핑의 고소한 향이 좋았다. 카페라테와 카푸치노도 유럽에서 마신 커피 중 제일이었다. 누나는 지금까지 마셨던 커피에서 느꼈던 물탄 맛이 느껴지지 않아 좋다고 했다. 지방이 많지 않았던 그 하몽도 담백해서 빵과 잘 어울렸다. 바게트에 하몽을 올리고 올리브오일을 뿌려먹고서 따듯한 커피를 마시는 게, 비 오는 아침에 야외 테이블에 앉아 느낄 수 있는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아침식사를 마치고서 고양된 그 기분으로 거울에 마주한 내 모습을 보며 내가 경험하고 있는 이 인생이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그 누구의 삶과도 바꾸어내고 싶지 않다. 지금의 이것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기에 스스로에게 기특하다고 말해주었다.


 마트에 들러 점심, 저녁, 내일 아침으로 먹을 음식들을 구매했다. 유럽에서 가본 마트 중 가장 큰 규모를 가진 곳이었다. 나의 흥미를 끄는 것들이 너무도 많았다. 특히 올리브오일. 원래 올리브오일을 좋아하는데 스페인에 오니 그 종류가 많아서 늘 관심이 갔다. 다만 올리브오일은 한 번에 다 먹을 수 있는 게 아니기에 고민했다. 흥미로워하면서도 망설이는 내게 누나는 그냥 사보자며 말해주었다. 특별하지 않을 말일 수도 있는데 종종 고민하는 순간에 누나가 해주는 그런 말은 응원처럼 들린다. 고마운 마음이다.


 마트에서 나오니 날씨가 개었다. 청명한 하늘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해가 땅을 비추기 시작하면서 초록빛 식물들도 다들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돌려받는다. 기분이 좋았다. 망가진 안경을 고쳐내기 위해 본드를 구매했다. 바게트를 매일 두어 개씩 먹는 우리는 빵과 함께 먹을 올리브 오일도 구매했다. 물이 잘 마르지 않던 샌들을 버리고 새로운 슬리퍼를 구매했다. 새하얀 게 마음에 든다. 거의 다 쓴 클렌징 오일을 대신에 클렌징 폼도 구매했다. 먹을 것도 잔뜩 사고서 무거워진 가방과 함께 다시 길을 나선다. 숙제처럼 가지고 있던 것들을 모두 해치우고 음식까지 구매해서 나서며 푸른 하늘을 마주하고 기분이 좋았다. 그리 어려울 것도 특별할 것도 없는 순간이 그리 좋았다. 입꼬리를 올려내고 있었다.


 숙소로 향하는 길에 배가 고프기에 가방에서 바게트를 꺼내 먹으며 걸었다. 누나는 내게 연비가 좋지 않다고 했다. 아무래도 확실하게 들켜버린 게 아닌가 싶다. 걸으며 무언가 먹는 걸 좋아한다. 한국에선 종종 맥도날드 감자튀김을 먹으며 걸었다. 유럽에서 여행하며 바게트를 손에 들고 걷는 일이 많다. 시골마을에도 맛있는 바게트 가게들이 하나씩은 자리 잡고 있다. 뜨거워도 차가워도 제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다. 배고플 때 언제든 꺼내들기 좋고 다른 것을 곁들이지 않아도 그 자체로 충분히 맛있다. 먹으며 걷는 걸 좋아한다.


 하루를 머물게 될 숙소에 발을 들인다. 주인분의 인상이 참 좋았다. 단단한 평화로움을 가진 사람처럼 보였다. 본인이 해야 할 일이 명확해 보이고 그 움직임이 여유로워 보였다. 순례자의 루틴을 지킨다. 숙소에 도착하면 몸을 씻어내고 입고 있던 옷도 씻어낸다. 이제는 당연하게 느껴지는 것들, 그것들이 자연스러워서 좋다.


저녁식사는 알베르게에서 먹는다. 스프, 샐러드, 메인, 디저트까지 4가지 코스였다. 가정식 같은 느낌을 주는 그 음식들이 따듯하게 느껴졌다. 채소의 단맛이 적당히 나고 지름  5mm, 두께 2mm쯤 되어 보이는 우주선 모양의 작은 파스타가 들어있었다. 한국에서 잘 접해볼 수 없는 무엇이었다. 샐러드도 간이 그리 강하지 않고 특별하지 않아 가정식스러웠다. 메인으로는 돼지고기 요리와 구운 파프리카가 나왔다. 지금까지 몇 번의 알베르게 식사를 하며 매번 다른 메인메뉴를 마주할 수 있어서 좋았다. 돼지고기 요리는 한국의 전과 비슷했다. 돼지 등심에 밀가루와 계란물을 입혀 부쳐낸 것 같았다. 돼지 등심이 부드럽고 아삭한 식감을 주는 게 좋았다. 고기만큼 파프리카가 맛있었다. 기름에 소금 간만 하고서 구워낸 것 같은 그것은 달고 풍미가 좋았다. 디저트는 포도와 멜론, 수박이었다. 설탕 뿌린 것처럼 달았다. 이미 배가 불렀음에도 계속 손이 가는 것을 참아내느라 애썼다.


 저녁식사를 하며 독일에서 온 이들과 함께 자리했다. 다들 저마다의 이유로 이곳에 온 이들과 대화해 볼 수 있는 기회는 늘 즐겁다. 오늘의 시간은 유독 즐거웠다. 농담이 자주 오갔고 많이 웃었다. 한 여자분은 샐러드를 잘 먹는 내게 그릇째로 놔주셨다. 땡큐마마 하니 포크로 샐러드를 집어 비행기도 해주셨다. 아무래도 아이들에게 음식으로 비행기 놀이해주는 건 만국 공통인가 싶다. 다들 크게 웃었다. 다섯 아이의 엄마라는 그녀는 알베르게에서 마주하면 종종 체력적으로 힘들어 보였다. 그럼에도 본인을 더 잘 알고, 일상으로 돌아가서 더 큰 에너지를 얻을 수 있을 거라며 이 길이 좋다고 했다. 독일 여행을 생각하고 있다는 내게 연락처를 알려주시며 집에 아이들과 고양이가 있으니 놀러 오라고 재워주시겠다고 했다.


11일차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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