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 세상이 색을 빼앗긴 새벽에 길을 나선다. 어제 미리 삶아둔 달걀을 먹는다. 길을 걸으며 껍질을 벗기고 칠리소스를 올려 베어문다. 누나는 속세의 맛이라고 표현했다. 부르고스에서 어쩌다 구매한 칠리소스가 이리 빛을 발할 줄 몰랐다. 길을 걸으며 삶은 계란을 먹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지만 어제 호스트가 내민 찜기덕에 속세를 맛봤다. 길을 걸으며 계란 까먹는 게 그리도 웃음이 났다. 카페도 문을 열지 않은 그 아침에 잘 챙겨 먹는 우리가 기특했다.
길을 걷다 뒤를 돌아보면 하늘이 붉어져오고 있었다. 걷는 방향과 반대되는 곳에서 올라오는 일출이라 아쉽기도 했지만 충분히 힘 있는 일출이었다. 프랑스길로 돌아와서 걸으며 하늘이 넓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평선이 눈높이에 있고 미세먼지나 안개같이 시야를 방해하는 것이 없다. 가시거리는 30km씩이나 된다. 그러니 제자리에 서서 한 바퀴를 돌아보면 무척이나 넓은 하늘을 볼 수 있다.
종종 산티아고까지 거리가 얼마나 남았는지 알리는 표시가 있다. 이 길의 끝에 점점 가까워지는 것이 아쉬운 마음이 든다. 지금의 이 시간이 충분히 행복하다는 뜻이다.
배가 고픈 차에 작은 마을을 마주했다. 카페에 들어가 바게트를 사려다가 비주얼이 별로기에 크로와상을 구매했다. 콰작, 프랑스에서 이걸 먹어보지 않은 걸 후회하게 하는 맛이었다. 결이 살아있고 고소한 맛이 좋았다.
그 마을에 이쁜 숙소가 많았다. 스파를 가진 곳, 잘 가꿔진 야외수영장을 가진 곳. 각자의 특장점을 가진 알베르게들이 순례자들을 기다려준다는 게 참 고마운 일처럼 느껴졌다.
길을 걷다 외딴곳에 수 세기 전에 자리한 듯한 건축물이 있었다. 호기심에 발을 들인 그곳은 알베르게로 운영되고 있었다. 세월의 흔적이 엿보이는 곳들이 있었고 그 규모감이 엄청났다. 오늘의 길 위에서 머물러보고 싶은 알베르게가 많았다. 특히 여기는 이 경험만을 위해라도 다시 와보고 싶을 만큼 신비로운 느낌을 안겨주었다.
오늘 머무를 숙소 또한 그만큼 독특한 곳이다. 그곳을 벗어나는 것이 아쉽지 않았던 이유다. 12세기에 순례자들을 위한 병원으로 운영되었다는 이곳은, 21세기에 침대 8개를 가진 알베르게로 운영되고 있었다. 호스트는 이탈리안이었고, 신기하게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건물이었다. 나의 흥미를 자극한, 나를 이곳으로 이끈 포인트이다.
이탈리안 5명과 스페니시 1명이 같이 머물렀다. 그중 혼자 온 이탈리안 여성분이 인상적이었다. 늘 밝은 표정으로 순수해 보이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이탈리안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에게 호스트가 하는 말을 번역해 알려주었다. 항상 정확한 발음으로 말했고 주변 사람들을 잘 배려했다.
식사 전에 게스트들이 모여 앉고 호스트가 세족식을 해주었다. 처음 보는 이의 발을 씻겨주고 그 발에 입을 맞추는 호스트가 갖는 믿음은 어떤 것인가 궁금해했다.
저녁으로는 호스트가 만들어준 까르보나라와 빵을 먹었다. 처음 먹는 정통 까르보나라인 데다 이탈리안이 만들어 주는 것이라 기대를 많이 했다. 맛있었지만 내가 갖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더 맛있어질 여지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스트가 사용한 치즈와 후추는 미리 갈아져 판매하는 것이었다. 더 좋은 재료들을 사용해 직접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