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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황해볼게요 Jul 27. 2024

고맙다는 건

 고맙다는 마음이 든다. 이런 시간을 보낼 수 있음에, 이런 곳에 존재할 수 있음에. 그런 순간들을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홀리게 아름다운 풍경들을 마주하고, 감동스러우리만큼 맛있는 음식을 입에 담고, 그 순간들을 좋다며 함께 즐긴다는 게 참 좋은 거라는 걸 여러 번 깨닫게 해주는 데에 고맙다는 마음이 든다.




 8시가 채 되지 않아 눈을 뜬다. 드라이브를 나선다. 옷을 챙겨 입고 키를 챙겨 조용히 문고리를 돌린다. 문을 채 다 열어내지 못하고 돌아선다. 누나를 깨운다. 큰일 났어! 놀라며 몸을 일으키고 무슨 일이야 하는 누나를 이끌고 문 밖으로 나선다.

 제각기 모양새로 흩뿌려진 구름이 붉게 빛나고 있다. 운이 좋았다. 그 타이밍에 문을 열고 마침 그 풍경이 눈에 담기고 함께 감탄할 사람이 있었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뉴질랜드였다. 짧게 일출을 마주하고서 시동을 걸어낸다. 방에 히터를 틀어두고 따듯한 물을 가져다 두고, 이번엔 진짜 드라이브에 나선다. 홀로.


 떠오르는 해에 비친 구름은 황홀하게 아름다웠다. 그 구름은 떠오른 해를 가려냈다. 푸른 하늘 없이 충분히 아름다웠지만 홀리지 못했다. 분명 더 매혹적일 수 있다는 게 보여서, 그렇지만 모든 걸 드러내지 않음이 멋있었다. 쌀쌀한 아침공기를 맞으며 창문을 모두 열고 히터를 강하게 틀어두고서 달렸다. 상쾌하다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개운함이 있었다.


 아침으로 알리오 올리오 파스타를 먹고 점심으로 샐러드 파스타를 챙긴다. 푸실리 파스타에 올리브오일, 소금, 후추를 넣고 아보카도, 당근, 레드빈을 함께 넣어 섞어낸다. 우리에게 설탕, 식초는 없었다. 사과주스가 있었다. 요리실험실. 어느 블로거의 추천으로 구매해 본 100% 생과일 사과주스, 우리의 흥미를 이끌기에 충분했다.


 오늘도 누나가 운전대를 잡는다. 나는 신중하게 오늘 들을 노래를 선곡한다. 고경표 님이 어느 프로그램에서 부른 사랑 했잖아. 아침 드라이브동안 내내 노래를 듣지 않고 달리다가 도착할 때가 다되어서 어떤 노래가 떠오른다. 유튜브에서 짧게 봤던 고경표 님이 부르는 노래. 힘주지 않고 편안하게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충분히 감미로웠다. 차 타고 가며 누나랑 들어야지 미리 생각해 두었다.


 크라이스트처치 방향으로 달리다 마주한 드넓은 호수에 차를 멈춰 세운다. 구름에 조금 가려진, 그럼에도 그숨겨 지지 않는 해의 빛에 비친 호수를 뾰족하게 각진 설산이 에워싸고 있다. 카메라를 먼저 들이밀지 않는다. 이 아름다운 순간을 사진이 그 기억의 생명을 연장해 줄 것이란 걸 안다. 다만 사진에 절대 담길 수 없는 직접 눈에 담는 그 풍경의 장엄함을 먼저 느껴본다. 누나에게 낮잠 자고 출발할래? 하고 물으니 좋다고 한다. 의자를 뒤로 젖히고서 눈을 감는다. 시계를 본다. 분명 얼마 지나지 않았다. 다만 12시 40분이었던 시간이 1시 20분이 되어있을 뿐이었다. 누나를 잠에서 깨우고 도시락을 집어든다.


 으깨어진 아보카도가 사과주스, 올리브오일과 함께 훌륭한 파스타 소스가 되어준다. 뉴질랜드 당근이 참 맛있다. 쓴맛이라곤 찾아볼 수 없고 아삭한 식감에 단맛이 나는 게 무슨 과일 같다. 푸실리면, 당근, 아보카도, 올리브오일, 한가득 뿌려낸 땅콩분태가 각기 제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 연신 맛있다며 미간을 찌푸려내고선 옆에 있던 이를 바라본다. 요리하는 거, 새로운 걸 시도해 보는 걸 좋아하는 나를 알고서 그걸 함께 즐거워해주고 내게 그럴 기회들을 주는 그녀에게 감사한 마음이 든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도시락을 비워내고 이번엔 운전대를 잡는다. 누나가 선곡해 주는 노래를 들으며 끝없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그 풍경들에 감탄하며 크라이스트처치로 향한다. 고경표 님의 사랑했잖아, 다섯 번쯤 더 들었으려나, 그 감미로운 목소리의 억지스럽지 않음이 좋았다. 아침에 드라이브하고 돌아오며 이 노래를 들으며 누나와 함께 들어야지 생각했다고 말한다. 따듯하게 웃어 보이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스스로 기특해해 준다.


 숙소에 짐을 내려두고 기름통을 가득 채우고서 렌터카를 반납하러 간다. 픽업할 때 받은 서류에 마일리지가 잘못 기록되어 있었다고, 혹시 추가금액이 결제될 수도 있는가 물으니 걱정 말라고 한다. 허용된 거리는 600km인데 서류상으로만 보면 우리가 1500km을 주행한 것으로 나와서 혹시나 했는데 걱정하는 일은 없었다. 직원분이 공항으로 셔틀 필요한지 묻기에 무료인지 물었다. 예약할 때 받은 정보로는 결제가 필요했다. 직원분은 평소엔 그렇지만 오늘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고마운 일이었다. 우리가 마트에 내려줄 수 있는가 물으니 당연하다는 듯 긍정의 답을 준다. 뉴질랜드에서 스쳐간 사람들은 친절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퀸스타운에서 렌터카를 픽업할 때 마주쳤던 노래 틀고 세차 중이던 분들, 테아나우 홀리데이 파크에서 키를 반납하려 하니 여행은 어땠는지 무엇이 좋았는지 묻던 분, 밀포드 사운드 카페에서 메뉴에 대해 설명하며 흥을 내뿜던 분, 와나카 마트에서 고기를 고르고 있으니 다가와 추천해 주시던 분, 오늘 친절을 베풀어준 렌터카회사 직원분까지. 나도 저런 여유로움을 갖고 살아야지 생각하게 만들던 사람들. 지금 내가 살아내고 있는 그 삶은 어떠한가를 생각해 볼 때, 이 방향대로 살아가면 저런 사람이 될 수 있는가 하는 하나의 기준점이 되어주는 사람들. 나는 그 사람들과 닮아가고 있는가,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렇다고 답한다. 스스로에게. 나는 내 삶을 좋아한다. 그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을 만큼.


 숙소에 들렀다 산책에 나선다. 새벽 비행 일정 때문에 예약한 공항이 가까운 숙소. 덕분에 처음 공항으로 산책을 간다. 오랜만에 몸무게를 재본다. 공항에 체중계가 있을 리는 없겠지. 캐리어의 무게를 재는 저울이었다. 작은 글씨로 안내문이 적혀있다. 사람이 올라서지 말라는 글. 얼른 내려온다. 나 같은 사람이 많았나 보다. 다시 숙소로 돌아오며 공항 주차장을 지난다. 다양한 차들을 보며 누나에게 이차는 어때 저차는 어때 묻는다. 늘 각진 차가 마음에 든다고 했던 누나는 차에 대한 취향이 명확했다. 애매하게 네모난 건 의미 없다. 확실하게 각진 차가 좋다고 그런다. 도요타 알파드를 보며 나의 드림카 중 하나라고 말했다. 내가 마음에 드는 포인트들을 설명한다. 옆면에서 휠하우스부터 3열 창까지의 면이 넓어서 둔해 보이는 거, 뒷모습이 식빵 같아서 독특한 거, 평범하지 않아서 대중들이 그리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는 거, 리뷰에 따르면 승차감이 엄청나게 좋다는 거. 마구 말하고서 흥미롭게 들어주는 누나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궁금해해 주고 함께 대화해 줘서 고맙다고.


 숙소에 돌아와서 짐을 챙긴다. 캐리어에 차곡차곡 짐을 정리해 낸다. 필요 없는 것들은 모두 버린다. 누나는 내게 버리는 걸 정말 좋아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비워내는 걸 좋아한다고 말했다. 캐리어에 있던 모든 짐들을 꺼내고 다시 정리한다. 매번 깔끔하게 만들어줘서 고맙다는 누나의 말에 스스로 기특해해 준다.


 저녁메뉴로는 남은 재료들을 몽땅 사용한다. 냄비에 스파게티를 삶는 동안 팬에 올리브오일과 마늘을 볶다 인디안 커리 참치캔을 넣고 커리맛이 나는 치킨스톡과 베트남 고추도 잘라 넣는다. 심지가 약간 느껴지게 삶아낸 면을 팬에 덜고 불에서 빼낸 뒤에 올리브오일과 면수를 넣고 소스가 끈적해질 때까지 섞어낸다.

 커리맛이 은은하게 감돌고 오일풍미가 좋은 파스타가 마음에 든다. 가장 마음에 드는 포인트는 단연코 끝에 남는 매운맛. 하루에 한 끼정도는 속을 씻어내 줄 매운맛이 필요하다며 누나와 깨끗하게 그릇을 비워낸다. 누나가 해보고 싶은 게 있다며 어딘가로 향하더니 웃으며 무언갈 숨겨서 가지고 온다. 정체는 메이플 시럽.

 밥 먹기 전에 주방을 구경하다 떠나는 여행자들이 남기고 간 프리푸드존에서 보고는 해보고 싶었다며 땅콩을 스푼에 올리고 메이플시럽을 뿌린다. 요리실험실. 그 모습이 뭐가 그리 좋은지 계속 웃음이 나더라. 누나에게 아마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일 거라 그러니, 이미 알고 있었다고 그런다. 이 시간 이 순간 이 사람이 참 마음에 든다. 별거 아닌 일에 웃음 짓게 만들어주는 건, 그래서 고마운 마음이 드는 건, 참 마음에 든다.


 뉴질랜드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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