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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황해볼게요 Jul 30. 2024

예상치 못할 일이 찾아들 공백

 마지막으로 시간을 확인한 건 2시 2분. 2시 26분 알람에 눈을 뜬다. 아니 눈은 뜨지 않았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손을 뻗고 X버튼을 드래그한다. 눈꺼풀이 들어 올려지질 않는다. 2분 뒤 다음 알람이 울린다. 몸을 일으켜낸다. 눈을 뜨진 않는다. 몇 걸음 옮겨 칫솔을 입에 문다. 잠에서 깨어난다.

 마저 짐을 정리해 넣고 사과를 씻어 먹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30분이 채 되지 못한 수면시간이 무색하게 컨디션이 좋다. 설렌다. 여행이 좋은 건 이런 거겠지. 여행의 시작은 늘 설렌다.

 우리의 여행루틴을 지키려 떠난다. 언젠가 누나에게 나의 여행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차를 타고 여행을 출발할 때면 늘 맥도날드에서 맥모닝을 먹는다고. 그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어준 누나덕에 우린 지난 두 번의 당일여행에서 맥모닝을 먹었다. 오늘도 그 루틴을 지키려 맥도날드로 향한다. 어라 24시간이라고 했는데 문이 닫혔다. 매장은 6시에 오픈하고 드라이브스루는 24시간 운영한다고 적혀있다. 드라이브 스루를 따라 걸어간다. 걸어서 접근하지 말라고 적혀있다. 우리 같은 사람이 많았나 보다.

 아쉽지만 맥도날드는 미뤄두고 공항으로 향한다. 15kg인 수화물 무게를 맞추려 캐리어에서 무거운 짐들을 백팩으로 옮겨낸다. 이제 짐 챙기기 걱정은 끝. 이려나 생각했지. 체크인 카운터에 줄을 서 있으니 우리 앞에 선 사람들이 메고 있던 백팩의 무게를 잰다. 어라라. 에이 설마 아니겠지. 캐리어 먼저 무게를 잰다. 역시 통과. 메고 있는 가방을 벗어보라고 그런다. 기내 수화물은 인당 7kg의 무게를 맞춰야 한단다. 캐리어를 펼친다. 미니멀해지려고 지금까지 많이도 비워냈다. 다만 더 비워야만 하는 상황을 맞닥뜨린 것뿐이다.


 샴푸, 비상약, 선크림, 로션, 렌즈세척액 같은 것들을 덜어낸다. 양말도 10켤레쯤 버리고, 충전기도 버린다. 비니도 파우치도 수건도 버릴 수 있는 건 다 버렸다. 심고 있던 슬리퍼를 벗어 넣고 무거운 등산화를 신는다. 두꺼운 옷들은 입는다. 간절한 마음으로 캐리어를 잠근다. 껄껄껄. 3kg. 다시 펼친다. 이젠 필요 없어서 버리는 건 없다. 옷을 집어든다. 늦가을 북유럽을 생각한 긴 옷들, 한여름에 북반구로 향하는 우리가 좋아하는 여름을 즐기려 챙겨둔 짧은 옷들, 수영복까지. 책 마저 버린다. 버릴 수 있는 건 다 버린다. 정말 다.

 참 많이도 웃었다. 뭐가 그리 웃기는지. 그 상황이 왜 그리도 재미있었는지 많이도 웃었다. 홀가분했다. 많이 비워냈지만 차마 놓지 못하고 있던 욕심을 놓아준다. 누나가 얘기한다. 우리는 미니멀하다고 했지만 진짜 미니멀이 아니었나 봐. 때때로 원치 않는 상황에서 마주한 나의 욕심을 놓아버리고 나서, 원치 않게 많은 것들을 비워내고 나서, 그 상황에 찾을 수 있는 긍정적인 점을 찾으려 하고 웃어 보일 수 있는 이 관계가 좋다.


 둘이서 10kg을 덜어냈다. 유럽 남부에서의 여름을, 늦가을의 북유럽을 함께할 우리의 소수정예 짐들이 꾸려졌다. 각자의 노트북과 전자기기를 포함하고서, 모든 짐과 옷을 포함하고서, 각자의 가방과 캐리어 무게까지 포함하고서, 채 30kg가 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 종종 누나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기분이 째지거든요. 오늘은 나도 따라 해 본다. 기분이 째져요.


 오클랜드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긴 여정의 시작이다. 여행은 설렌다. 설렘을 안겨준다. 오래 고대하던 일을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한다는 건 참 아름다운 일이다. 가슴이 뛴다는 게 그 가슴뜀을 함께 즐길 수 있다는 게 참 마음에 든다.


7월의 오클랜드는 여전히 춥다. 7월의 겨울은 여전히 낯선 우리에게, 여름을 좋아하는 우리는 7월의 여름을 즐기려 날아간다. 쓰촨에어를 타고 쓰촨/사천/청두로 불리는 마라의 도시로 간다. 1월에 네팔에 가며오며 들렀던 그 도시가, 몸을 실었던 그 항공사가 마음에 들었다. 항공권을 티켓팅하며 쓰촨항공/쓰촨경유를 발견하고서 반가운 마음마저 들었다. 청두공항에서 항공사를 변경하는 일정이었다. 지난번 맛있었던 마라 완탕과 마라탄탄면을 기대하며 13시간을 날아간다.


 비행기에선 영화를 보고 드라마를 보고 음악을 듣고 두 번의 기내식과 한 번의 간식을 먹고 잠도 자다가 눈을 마주하고 한참을 대화했다. 양치를 세 번이나 했다. 13시간은 그만큼 길었다. 발에 있는 혈관이 모습을 숨겨가기 시작하고 여기저기 저릿해지기 시작한다. 이젠 더 못 버티겠다 싶을 때쯤 반가운 방송이 들린다.


 청두공항에 내려서 지문을 먼저 스캔한다. 열손가락 전부. 나는 스캔하라는 지시가 없다. 6개월 전 기록을 가지고 있나 보다. CCTV가 한눈에 담기는 것만 50개는 족히 넘는다. 이 공항 내에선 무엇을 하는지 일거수일투족 감시당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셀프체크인을 해야 한다. 입국신고서를 작성하고 이미그레이션으로 향한다. 누나가 먼저 심사대 앞에 섰다. 무슨 일인지 대화가 꽤 오간다. 역시 중국은 꼼꼼하게 점검하는구나 생각하고 있던 순간 심사대 직원이 다른 직원을 부르더니 따라가라고 한다. Transfers to international without checked baggage. 우리 수화물은 밖에 있다니까.


 우리 셀프체크인 해야 해. 우리 수화물 밖에 있어. 우리 나가야 해. 나갈 수 없다고 한다. 항공사 직원이 올 테니 기다리라고 한다. 대여섯 명의 직원이 지나가며 우리에게 설명해 준다. 너희는 나갈 수 없고 여기서 기다려야 해. 다른 직원이 올 거야. 그 누구도 확실하게 알려주는 분은 없었다.


 옆에 누가 봐도 어떻게 봐도 우리와 비슷하게 난처해 보이는 이들이 있다. 헬로. 우루과이와 남아메리카에서 왔다는 그들은 태국으로 가고 있는 중인데 이곳에서 갇혀있다며 누군가가 여권을 가져갔다고 하더라. 동지가 나타났다. 그리고 우리만큼 난처해하는 직원이 한 명 있었다. 그들의 곁에 붙어서 본인의 일인 양 해결해 주려 셔츠를 흩트리고 땀을 흘려가며 고생해 주던 직원. 와이파이하나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는 중국에서 그들의 추가 결제와 티켓팅을 돕던 그 직원. 한참을 고생하다 한마디 뱉는다. Actually it's my first day. 웃었다. 웃겼다. 너도나도 웃는다. 설렘 가득했을 첫 출근날, 이 고역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들 곁에서 그 상황과 씨름하고 있는 그 사회초년생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미안하지만 덕분에 꽤 웃었다. 두 동지와 아니, 세 동지와 함께 사진도 남겼다.


 남미친구들은 떠났다. 체크인카운터에 서니 수화물티켓을 달라고 한다. 이미 버렸다. 그것도 찢어서 버렸다. 그거라도 필요했다. 허락을 받고 화분뒤로 구역을 벗어나 그 티켓을 버린 쓰레기통을 이리저리 뒤진다. 집히는 티켓은 전부 다 주워다가 다시 조립한다. 오랜만에 퍼즐 맞추기 하는 것 같다. 우리의 시간이 어찌 바뀌게 될지 모르는 그 순간이 즐거웠다. 내가 하는 여행엔 예측할 수 없는 것들에게 내어줄 공백을 만들어두곤 한다. 새로운 즐거움이 찾아들길 바라며.


 우여곡절 끝에 유럽으로 향한다.


 0일 차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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