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에는 눈이 없다
돈에는 눈이 없다. 돈은 자신을 소유한 사람이 좋은가 나쁜가를 따지지 않는다. 돈은 자신을 소유한 사람에 충실하게 복종한다. 돈을 번 사람이 어떻게 벌었는가 따지지 않는다. 그렇게 번 돈을 어떻게 쓰는가도 상관하지 않는다. 주인이 사용하는 대로 돈은 충실히 그 역할을 한다.
선과 악은 돈을 버는 행위와 전혀 관계가 없다. 착한 사람이 부자가 되어 잘 살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아 못 산다는 이야기는 이야기 책에서만 나오는 것이다. 현실에서 돈을 벌기 위해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할 이유가 없고, 나쁜 사람이 돈을 못 벌 이유도 없다. 달리기 잘하는 사람이 요리도 잘할지 못 할지 모르는 것만큼이나 서로 다른 문제다.
부자들 중에는 착한 사람도 많고 나쁜 사람도 많다. 돈을 버는 행위에는 도덕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이 둘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따라서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착한 사람이 되려는 것은 순진하고 어리석은 행위이다. 돈을 많이 벌기 위해 나쁜 사람이 되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착하든 나쁘든 돈을 버는 사람들의 특징은 돈을 벌어야 할 확실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부자가 되어야 할 이유는 누구에게는 있다. 그러나 '확실한' 이유가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 사람은 자신이 돈을 벌기까지 쉼 없이 추구한다. 끊임없이 연구하고 노력한다. 돈을 벌 수 있을 때까지 나아간다.
따라서 돈을 버는 행위에 있어 선과 악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그렇게 번 돈을 어떻게 쓰느냐도 같다. 이 둘을 철저히 분리해야만 한다. 선과 악은 돈 이상의 가치이다. 그것은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돈은 과정과 도구일 뿐이다.
나쁜 사람도 부자가 될 수 있다. 모든 나쁜 부자가 벌을 받는 것도 아니다. 나쁜 부자가 벌을 받는 경우는 나쁜 사람이 부자가 되어서가 아니다. 그가 나쁜 행위를 했기 때문에, 그 행위에 대해 내려지는 처벌일 뿐이다. 나쁜 부자도 벌 안 받고 잘 살다가 편히 죽을 수 있다. 이것을 불공평하다고 말하면 안 된다. 인생은 절대로 공평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충분히 불공평하다. 부모의 재력과 집안뿐이 아니다. 한국에서 태어난 것과 아프리카 정글 속에서 태어난 삶이 같을 수 없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과 가축으로 태어난 삶이 같을 수 없다. 심지어 윗마을인가 아랫마을인가에 따라 삶은 불공평할 수 있다. 한 집안에서 태어났어도 첫째인가 막내인가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삶은 심각하게 불공평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억울해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체념과 도전 때문이다. 때때로 체념은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오르지 못할 나무'를 쳐다보지조차 않음으로써 우리는 주어진 삶에 만족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도전이다. 우리에게는 태어난 환경을 바꿀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이 있다. 아프리카 정글 속에서 태어났어도 미국에 가 성공한 사업가가 될 수 있다. 이렇게 태어나는 것은 선택할 수 없지만 삶은 선택할 수 있다.
부자가 된다는 것은 선과 악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돈을 벌겠다는 확실한 의지, 그것에 대한 갈망의 크기, 포기하지 않는 열정 등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왜 부자가 못 되었을까? 부자 되기보다는 착해지기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또 착한 사람이 복을 받을 거라는 미신 때문이었다. 나는 나의 잘못된 선택과 그릇된 믿음 때문에 지금 가난한 것이다. 그렇다고 나쁜 사람이 되겠다는 것은 아니다. 나쁜 것과 부자는 착한 것과 부자만큼이나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부자가 되어야 할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시간은 많지 않다. 그래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나는 착한 부자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