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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 Aug 02. 2022


뜬금없는 사랑타령

요즘 대세인 드라마에서 자폐스펙트럼을 가진 변호사를 사랑하는 남주인공이 상대방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지속될지 모르면서 쉽게 고백할 수 없음에 대해 한탄하는 대사가 나온다. 소설이나 드라마를 보면 인생에 단 한 번뿐인 사랑이 많이 나온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서로 죽고 못살아 결혼하고, 곧 식상해지고, 서로를 원망하거나 혹은 헤어지거나 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그들도 너무나 사랑했었는데 왜 그럼 상황이 되는 걸까?


혹자는 말한다. "결혼이란 제도는 시대를 거스르는 구시대적인 장치로,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하지 않은 것을 제도로 묶어놓는다고 말이다". 누군가에 호감을 갖고, 좋아하고, 즐겁게 한동안 만나는 일은 너무나 쉽다. 그런데 그걸 유지하는 일은 극도로 힘든 아니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사랑의 결실을 유지할 수 있을까? 왜 유지해야 하느냐라고 생각한다면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두 사람이 만나서 서로 좋아하게 될 때, 서로에 대한 유효기간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제도에 안착하고 싶어 하고, 남들과 다르게 사는걸 두려워한다. 좀 더 근본적으로는 사람들은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을 거부하거나 두려워하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학교를 다니고, 대학을 가고, 직장을 얻은 후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것이 당연하다고 교육받고 살아왔다. 그런 상황에서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당연히 결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할 일일 것이다. 그런데 돌발상황이 생기는 것이다. 영화나 소설에서처럼 그들의 사랑이 더 이상 지속되지 않는 것이다. 왜일까?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더 이상 가슴 설레는 호르몬의 분비도 없고, 매일 같은 집에서 부대끼면서 현실적인 문제들로 언쟁을 벌이는 일들은 상대방을 한집에 사는 다른 한 인간 정도 이상의 감흥은 기대하기 어렵게 만든다. 


안타까운 일은, 인간들은 너무 복잡하다는 것이다. 한 가지만 채워져서는 쉽게 만족되지 않는다. 경제적인 부분이 채워지면 감정에 대한 아쉬움이 생긴다. 서로 비교하면서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기도 한다. 내가 동물들에게서 배우고 싶은 것은 그들의 절대적인 애정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어린 시절부터 한 번도 사랑이나 결혼에 대해 기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쩌면 나한테 맞는 사람이 생길 때까지 큰 기대 없이 편안하게 지냈던 것 같다. 내가 가장 곤란했던 때는, 친구들이 결혼한다고 했을 때 매우 슬픈 얼굴이 되어 "왜?"라고 나도 모르게 질문을 했을 때이다. 왜 사람들이 결혼을 하고 싶어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던 적이 있다. 사랑은 유효기간이 있고, 결혼의 또 다른 의무와 책임의 시작인데 왜 그럴까 싶었다. 


그럼 다시 사랑으로 돌아가서, 평생 유지되는 사랑이 있을까 한다면, '아마도'라도 말하고 싶다. 그 사랑의 형태가 열정에서 편안함으로 바뀔 순 있지만, 지속 가능한 경우도 드물게 있다고 생각하다.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서 사랑의 유지할 수 있다. 서로 상대방의 공간을 인정하고 배려한다면 말이다. 예전에 읽은 탈무드에서 완벽한 결혼에 대한 얘기가 나온 걸 읽은 적이 있다. 한 남성이 여성에서 결혼은 청하자, 여자가 조건을 걸었다.

"우리는 강하나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집을 지어, 각자의 집에서 살면서, 서로 방문할 수 있다."는. 

나는 아마도 경제적인 여건이 되었으면, 이걸 실천했을 것 같다. 나의 남편이 허락을 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마 대다수의 우리는 사랑받고 사랑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사랑이란 이름으로 소유라는 꼬리표를 달고서 서로 힘들게 하면서 결국 나가떨어져 버리는 게 아닐까, 혹은 상대방의 희생만을 강요하는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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