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검은 현진과 보낸 4년간의 학교생활을 떠올렸다.
그는 6년제 수의과대학 과정을 입학해 다녔고, 현진은 사학과를 졸업후 편입해서 전공의 과정 4년을 그와 같이 마쳤다.
처음 현진을 보았을 때는 그녀가 호감가는 인상의 두살 많은 누나 이상으로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는 어렸을때부터 키도 크고 잘생긴 외모 그리고 뛰어난 성적으로 인기가 아주 많았고, 수의과 대학에 들어와서도 다르지 않았다.
같은 학년의 여학생들은 그를 동경했고, 그는 그런 자신의 인기를 즐기고 있었다.
보검은 취미로 피아노를 쳤는데, 워낙 수준급이라 가끔 아르바이트로 식당이나 결혼식에서 반주를 하기도 했다. 농구도 좋아해서 시간이 날때면 친구들과 같이 경기를 하곤 했다.
외부적으로 그는 완벽한 엄친아였다.
하지만, 그는 모든 것이 완벽한 자신에게 어울릴 만한 여자친구를 찾을 수가 없었다. 가끔 그에게 호감을 갖고 다가오는 여자들을 만나보긴 했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현진과는 학생회 모임을 같이 시작하면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현진 역시 누가 봐도 괜찮은 외모와 좋은 성격으로 인기가 많았지만, 이상하게도 남학생들의 엄청난 관심을 모두 거절하고 싱글로 학교생활을 했다.
어느 순간부터 보검은 현진에게 누나 이상의 호감이 생기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그녀는 주변 사람들에게 항상 친절했고, 다정다감했다. 누군가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나서서 도와주고 학교일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도 좋은 성적도 유지했다. 사실 보검과 현진은 서로 과 수석을 다투는 사이기도 했다.
이성에게 큰 관심을 주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보검은 현진이 점점 더 그에게 어울리는 상대라고 느끼게 되었다.
같은 나이의 주변 여학생들처럼 징징거리지도 않고, 항상 이성적이고 어른스러운 그녀가 더없이 마음에 들었다. 그가 언제가 결혼을 하고 그의 아이를 제대도 키울수 있는 여성으로 판단되기도 했다.
하지만, 보통의 다른 여학생들은 그가 조금만 잘해주거나 신경을 써주면 금방 그에게 호감을 표현하고 다가오는데 이상하게도 현진은 친절하지만 한번도 선을 넘는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았던 것도 그에겐 만족스러운 부분이었다.
보검은 여자친구를 만들기 위해 여자에게 한번도 먼저 고백을 하거나 그이상의 노력이 필요한 적이 없었던 사람이라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현진과 사귀게 될거라 생각하면서 어느새 졸업식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모든 수의학 과정이 끝났고, 두달 후 수의사 면허시험을 마치면 그들은 정식으로 수의사가 된다.
오늘은 4학년 졸업시험이 끝나고 마지막 행사인 졸업파티 날이다.
학생들과 교수들은 같이 간단한 장기자랑 행사를 하고 가벼운 술자리를 가진후 모임은 끝이 났고, 대학원 과정에 진학하는 친구들 외의 대부분의 학생들은 며칠내로 짐을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보검은 현진이 내일 서울에 있는 집으로 돌아갈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졸업후 집근처에 있는 동물병원에서 일을 하기로 이미 내정되어 있었고, 며칠전부터 짐정리를 시작했다.
그런 상황을 알고 있었던 보검은 하루종일 마음이 답답했다. 그녀가 떠나기 전에 그들이 관계에 새로운 전환점이 필요했다. 그래서 모임이 끝난 후 그는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보검이 현진의 집앞에 도착한 건 새벽 한시쯤이었다. 그는 그녀의 원룸 앞에서 한참을 망설인후 문을 두드렸다. 그의 손에는 따뜻한 두잔의 편의점 커피가 들려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현진의 집 문이 열렸다.
"어 보검아! 왠일이야 이시간에? 너 무슨일 있니?"
현진은 편안한 츄리닝과 티셔츠 차림으로 문 앞에 서서 물었다.
" 누나! 오늘이 우리 학교 마지막 날인데 누나랑 커피한잔 하면서 얘기나 하려고 들렸어. 혹시 잠깐 시간 꽨찮아?"
보검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려 애쓰며 말했다.
"어 그래? 나 지금 짐 싸는거 마무리 하고 있어 집이 엉망인데 그래도 괜찮으면 잠깐 들어와 그럼."
현진은 피곤해 보이지만 특유의 밝은 표정으로 그를 집안으로 이끌었다.
현진이 서있던 현관은 그녀의 옅은 버버리 향수 냄새가 남아 있었다.
집안으로 들어선 보검은 여러개의 박스가 쌓여있는 것을 볼수 있었다. 그녀의 침대와 책상만이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보검은 가끔 같은 학생회의 친구들과 그녀의 집에 들린 적이 전에도 있었다. 그녀의 방에는 그녀의 향수냄새가 은은하게 나곤 했는데, 그건 그녀의 시그니쳐와도 같았다. 버버리향수는 달콤하지만 향이 진해 역할수도 있는데, 그녀는 항상 은은하게 자연스러운 향을 유지했다. 그녀를 부러워하던 다른 여학생들이 가끔 그녀와 같은 향수를 뿌리곤 했는데, 대체로 너무 진하게 뿌리거나 다른 화장품이나 몸냄새와 섞여 보검은 그 냄새를 많으면 역겹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집이 너무 지저분하지? 거기 책상 의자에 앉아."
현진은 보검의 커피캔을 하나 받아 캔뚜껑을 열면서 그녀의 침대 모서리에 앉았다.
"아 기분이 너무 이상하다 그지? 우리가 벌써 졸업이라니. 면허시험만 끝나면 우리는 이제 수의사가 되는 건데. 기대되면서도 무섭기도 하고 그렇다. 난."
현진은 평소처럼 상냥하게 보검에게 말했다.
"그러게. 누나랑 같이 지낸지도 벌써 사년인데, 이제 그것도 끝났네. 난 그게 엄청 서운해"
보검은 슬쩍 그녀의 감정을 떠보는 말을 꺼냈다.
"나도 그래. 글치만 너도 졸업하면 서울에서 임상 할 거잖아. 그럼 우리 가끔 얼굴보고 일하는 거 힘들면 서로 신세한탄도 하면서 하면 되지. 너 졸업한다고 이제 나 안볼거 아니잖아? 하하"
현진은 늘 그랬다. 보검이 뭔가 약간의 의미있는 말을 하면, 자연스럽게 밀어내서 더이상 진행이 되지 않았다.
보검이 이제는 결론을 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심호흡을 하고 말을 이었다.
"누나! 나 누나한테 할말이 있어!"
"뭔데 글케 심각해? 왜 너 무슨 고민 있어? 누나한테 다 말해봐. 내가 도와줄수 있는 거면 뭐든 도와줄께"
"누나는 나 어떻게 생각해?"
보검의 질문을 들은 현진은 약간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뭘 어떻게 생각해. 내가 너무 좋아하는 후배 보검이지. 내 친동생만큼 좋아하는. 사실 내 친 남동생은 나랑 맨날 투닥거려서 내가 진짜 내 친 남동생이면 더 좋을것 같다. 하하'
잠시 침묵이 흘렀다. 똑똑한 보검이 그녀의 말뜻을 모를리가 없었다.
현진은 보검에게 간접적으로 거절의 대답을 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보검은 정말 이해가 되지도 받아들여 지지도 않았지만, 오늘은 그녀와 끝을 봐야만 했다. 현진의 그의 여자가 되어야만 했으니깐.
"누나.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잖아? 누나는 내가 그렇게 싫어? 내가 남자로는 도저히 안되겠어?"
현진은 심각한 얼굴이 되어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뭔가 결심한 듯 그에게 얘기하기 시작했다.
"보검아! 나한테 넌 정말 좋은 사람이야. 내가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면 분명히 너를 이성으로 좋아했을 거야. "
현진의 말에 보검은 당황했다.
"그게 무슨 뜻이야?"
"나 남자를 이성으로 좋아하지 않아. 미안해. 이건 친한 사이라도 정말 쉽게 얘기할 수가 있는 일이 아니더라. "
보검은 현진의 말에 머리의 피가 거꾸로 도는 느낌이 들었다. 현진의 얘기는 그녀가 남자가 아닌 여자를 좋아한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누나. 누나가 뭔가 착각을 하는 것 같은데, 누난 그런 사람 아니야. 누나가 잘못 생각한거야. 일단 나랑 만나보자. 그럼 누나 생각도 바뀔거야."
보검은 침대에 앉은 현진에게 다가가 최대한 이성적으로 얘기하려고 노력하면서,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현진은 그런 보검의 팔을 세게 뿌리치며 보검이 한번도 본적이 없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니가 날 이해하기 힘들다는 거 알아.. 하지만, 이 세상은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어. 니가 생각하는 세계가 전부는 아니라는 거야. 그니깐 니 기준으로 날 평가하지는 말아주라.
피곤하다. 오늘은 그만 가고, 우리 시간되면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보검은 자신이 이렇게까지 너그럽게 그녀를 받아들이려고 하는데 이런 태도를 취하는 현진에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순간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는지도 모르는 사이 그의 팔은 침대에 현진을 눕히고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보검은 침대위의 축 늘어져 누워있는 현진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게 뒤죽박죽이었다. 그는 불과 한시간전 현진의 집에 왔을때 이런 상황이 올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보검은 왜 이렇게 된건지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려고 노력하며 머리를 싸매고 주저앉았다.
'이건 다 니가 자초한 일이야! 난 너를 내 여자로 받아들이려고 했는데, 니가 모든걸 다 망쳐버렸어!'
보검은 현진에 대한 원망을 지울수 없었다. 하지만 이 상황은 어떻게든 해결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하지? 내가 지금 여기서 나가면, 누군가 누나를 발견하고 경찰들은 이걸 살인 사건으로 조사하기 시작할 거야. 내 흔적을 지운다고 해도, 근처 CCTV든 블랙박스를 뒤지면 내가 여기 왔던 걸 알아낼 수도 있을거야. '
보검은 이 상황이 조용히 끝나려면 다른 결론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근데 이게 자살이라면? 갑자기 집에서 목을 매달았다면? 근데 왜? '
이유가 필요하다.
그때 문득 현진이 동성애자라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보가 필요해'
그는 현진의 핸드폰을 찾아 그녀의 지문으로 핸드폰을 열었다. 그리고 그안의 메세지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잭 팟!
그녀는 학생회의 한 여학생과 꽤 많은 문자를 주고 받았고 통화기록도 많이 있었다. 상대의 이름은 '수현'.
수현이 현진과 친한건 알고 있었다. 둘이 자주 같이 어울려 다니는 걸 본적인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문자는 그들이 단순한 친구사이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이거다!'
보검은 기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현진이 여자를 좋아한다는 걸 내가 몰랐다면, 아마 그걸 아는 사람은 현진과 깊은 사이였던 수현이 유일한 사람이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지 않더라고 공개적인 상황은 절대 아니고, 이런 상황이 현진과 수현에게 힘들었을 수 있다.
그리고 그걸 괴로워한 현진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면?
보검은 현진을 들쳐없고 옥상으로 올라와 있었다. 현진의 원룸은 4층 건물이었다.
새벽 두시반에 추운 겨울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원룸에 사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미 시작한 겨울 방학으로 집에 내려갔기에 거의 빈 건물과 다름이 없었다.
보검은 잠시 현진을 두고 다시 그녀의 집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의 흔적을 지우기 시작했다.
그들이 먹던 커피캔은 그의 백팩에 넣었고, 지문이 많이 묻었을 곳은 물티슈로 닦기 시작했다. 약간의 지문은 그가 전에 현진의 집에 온적이 있었기에 이해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이것이 자살로 마무리 된다면, 집을 자세하게 조사할 이유도 없다.
현진의 침대를 가지런히 정리하고, 이사짐 박스를 정돈했다.
그는 다시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녀의 핸드폰으로 메세지를 적었다.
수현에게 보내는 하나 '수현아 미안해. 나 더이상은 너무 힘들어.'
현진의 엄마에게 하나 '엄마, 미안해. 나 때문에 너무 슬퍼하지마'
장갑을 끼고 그녀의 핸드폰을 닦은 후 그녀의 손가락을 이용해 메세지를 보냈다.
그리고 차가워진 그녀의 몸을 옥상에서 밀어냈다.
'쿵' 하는 소리를 듣고 재빨리 옥상에서 내려가 그녀의 집을 빠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