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일정이 거의 끝나갈 즈음 핸드폰의 메시지 진동이 울렸다.
'오늘 바빠? 오랜만에 같이 저녁이나 먹을까?'
하빈의 애인겸 친구인 오석의 문자다.
'좋아. 오늘 저녁 괜찮아. 어디서 볼까?'
'내가 너네 병원으로 갈게. 너네 7시까지 진료하지? 간만에 애인 노릇 좀 해야겠네. ㅎㅎㅎ'
오석은 하빈의 대학 동창이자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이다. 그들의 관계는 외부적으로 연인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냥 친한 친구일 뿐이다
대학시절 하빈은 특별히 친하게 지내는 친구를 쉽게 만들지 못했다.
가끔 같은 과 여자친구들과 어울리기도 했지만, 그들의 주요 관심사인 옷과 화장품 혹은 향수이야기에 하빈은 늘 겉돌기만 했다.
어린 시절부터 갈등을 겪는 부모님을 보면서 이성친구나 결혼에 관심도 없었기에, 남자친구를 사귈 생각도 크게 없었다. 몇 번 그에게 다가오던 이성친구와 잠시 만나기도 했는데, 오로지 원초적인 관심사만 있는 또래의 남자친구들도 그녀에게는 부담스럽기만 했다.
그러다 하빈과 비슷하게 또래의 동성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던 오석과 우연히 친해지게 되었고, 그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석은 외부적으로는 남성이지만 어렸을 때부터 스스로가 여성의 인격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오랜 기간 혼자서 고민하고 있었다.
시대가 변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보수적인 한국사회에서 성전환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더구나 보수적인 부모님에게 장남이자 외아들인 그가 그런 생각을 표현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빈과 친해진 그는 어렵게 그 사실을 털어놓았다.
처음에는 놀랐지만 하빈은 그를 이해해 주었고 그렇게 그들은 비밀을 공유한 친구가 되었다.
또한 남자친구가 필요하지 않은 하빈에게 외부적으로는 남자친구로 그녀의 방어막이 되어준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공인된 캠퍼스 커플로 지난 7년간 지내왔다.
사실 오석은 최근 들어간 동물병원에서 수의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그의 희망은 미국으로 건너가서 정착한 후 트랜스젠더로의 삶을 시작하는 것이라 미국 수의사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똑똑! 들어가도 되나요?'
말끔한 차림의 오석이 하빈의 진료실로 들어왔다.
"어 왔어?"
하빈은 오랜만에 본 오석을 반갑게 맞았다. 최근에는 오석이 병원일과 미국수의사 시험준비를 하느라 바빠 자주 보지 못하던 터였다.
"병원일은 좀 어때? 많이 바빠?"
오석은 진료실의 맡은 편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오석은 하빈과 같이 학교를 마쳤지만, 군입대 대신 공중보건의 과정 3년을 마치고 최근에 동물병원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뭐 그런대로 괜찮아. 아직은 모르는 게 많아서 계속 공부해야지. 너는 어때? 병원생활 적응은 잘하고 있어?"
"뭐 적응 중이라고 할 수 있지. 근데 나 어제 처음으로 수컷 중성화 했는데, 생각보다는 잘한 것 같아. 첨에는 수술 같은 건 도저히 못할 것 같았는데, 막상 해보니 재밌는 것 같기도 해. 적어도 외과는 시작과 끝이 분명하잖아. 이제 중성화 한번 한 것 갖고 너무 앞서나갔나? 하하"
오석은 괜히 민망해하면서 중얼거렸다.
"아냐. 수술에 있어서 자신감은 중요한 것 같아. 나도 수술할 때는 항상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하는데, 그러고 나면 확실히 더 잘되는 것 같아. 근데 나 이제 끝날 시간 다 됐는데, 우리 어디 갈까? 너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하빈은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며 말했다.
"나 옷 갈아입고 내려갈 테니깐 너 먼저 일층 내려가 있어. 아 참, 너 정석선배한테 인사했어? 선배 재활치료실에 있으니깐 안 했으면 잠깐 같이 가서 인사나 하자"
하빈이 오석과 같이 선배의 진료실에 갔을 때 선배는 간호사 수정과 같이 디스크 치료 중인 강아지에게 침을 놓고 있는 중이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바쁘세요? 하빈이 보러 왔어요."
오석이 진료실에 들어가면서 인사를 건네자, 정석선배는 그를 반갑게 맞았다.
"어 오석아! 오랜만이다. 요즘 왜 이렇게 뜸했어? 병원 생활 하는 거 많이 힘들어? "
"아니에요. 선배님. 이래저래 일이 좀 많았어요. 선배님은 별일 없으시죠? "
"그럼. 너 오랜만에 왔는데 밥이라도 같이 먹으러 가야 되는데, 내가 오늘 얘 때문에 좀 정신이 없네. "
정석선배는 침을 놓고 있는 강아지를 가리키며 말을 이고었다.
"두 살밖에 안 됐는데 디스크가 벌써 두 번째 와서, 이번엔 신경증상도 심하네. 입원해서 스테로이드 주사도 맞고, 한방치료도 같이 병행해야 할 것 같아. 미안하다. 담에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괜찮아요. 선배. 그럼 다음에 뵐게요"
하빈이 일층에 내려왔을 때는 실장님과 간호사 숙이도 같이 있었다.
"어 실장님이랑 숙이씨도 같이 가실래요? 저희 근처에 고깃집을 가려고 하는데."
하빈의 물음에 숙이는 급 좋아했지만, 실장님이 간만에 둘이 데이트하는데 방해하지 말라며 숙이를 데리고 나갔다.
하빈이 오석과 같이 건물을 나왔을 때, 하빈은 오석에게 줄 생일선물을 진료실에 두고 온 걸 깨달았다. 저번달에 오석의 생일에 주려고 샀는데 조만간 줘야지 생각하며 병원에 갖다 놓았던 것이다..
"오석아, 나 잠깐 다시 병원 들어갔다 올게. 깜박한 게 있어."
하빈이 병원 이층으로 들어가 진료실 책상에서 선물을 꺼내 나올 때 재활치료실의 정석선배와 수정 간호사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진료실에 있는 그들은 병원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 듯 정석선배의 손이 수정의 얼굴을 쓰다듬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당황한 하빈은 황급히 복도를 지나쳐 병원을 빠져나왔다.
잠시 후 하빈과 오석은 고깃집에 앉아 있었다.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는 하빈에게 오석이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오석의 물음에 하빈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망설였다.
"말하기 곤란하면 안 해도 돼. 네가 뭐 잘못한 건 아닌 것 같고. 네 주변사람 일이라서 말하기 곤란하면 안 해도 돼. 너 전에 잠깐 만나던 남자친구, 뭐지 그 생물학과인가 거기 다니던 애. 걔가 우리 과 수아랑 바람피운 거 알았을 때도 그런 표정이었어."
"뭐? 하하 내가 그랬어? 근데 지금은 네가 내 남자 친구인데. 너 바람핀거 아니지? 하하 농담이야. "
하빈은 농담으로 넘겨버리려고 했지만, 하빈을 잘 알고 있는 오석은 그녀가 뭔가 불편한 일을 알게 됐다는 걸 짐각적으로 알 수 있었다.
"우리일 아니니깐 상관하지 말자. 그래서, 병원 적응은 잘 돼 가? 얘기 좀 해봐"
하빈은 화제를 돌리며 오석에게 물었다.
"뭐 괜찮아. 원장님도 좋으시고, 나한테 진료할 기회도 자꾸 주시고, 수술도 내가 원하면 간단한 것부터 하게 해 주시겠데. " 오석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래? 잘됐다. 미국 수의사 준비는 잘 돼 가? 처음엔 영어시험부터 하는 거라 그랬잖아. 영어시험은 언제쯤 보려고?"
"한 6개월 정도는 생각해. 아무래도 병원일 하면서 같이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깐. 아 참! 나 너 보면 할 말이 있었는데."
오석이 무언가 생각난 듯 얘기했다.
"우리 원장님이 그러는데, 강성구에서 병원 하는 그 외과 잘하는 원장님 있잖아. 그 병원에서 12주 과정의 수술세미나를 한데. 4주는 일반외과, 4주는 안과수술, 4주는 일반적인 정형외과로 구성되는데, 일주일에 한 번씩 저녁 7시부터 10까지 한데. 주로 병원에서 자주 하는 수술들로 구성돼서 일하는데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아. 우리 같이 하면 좋을 것 같아서."
오석의 말에 하빈이 최근에 드는 고민에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과는 혼자서 공부해서 채워갈 수 있는 부분이 많지만, 수술은 사실 실습만큼 확실하게 실력이 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 그거 좋은 생각인 것 같아. 언제 하는데?"
대학교 시절 하빈은 영화 동아리를 한 적이 있었다. 거기서 만난 다른 과 남학생인 민종은 키도 크고 잘생긴 편이라 꽤 인기가 많았는데, 그는 하빈을 많이 좋아했고 몇 달간의 지속적인 구애에 그와 사귀게 되었다.
그는 남녀관계에 대해 부정적인 하빈을 인내심 있게 기다려 주었고, 하빈을 위해 목숨이라도 바칠 듯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다만 항상 어느 이상의 선을 유지하려는 하빈은 그와 둘이 있을 때 그의 과도한 스킨십이 불편해 가능한 다른 사람들과 같이 만나려 했다. 그래서 같이 어울리던 친구가 하빈과 같은 과인 수아였다.
수아는 귀엽고 세련된 스타일이라 그녀를 좋아하는 남자들이 많았지만 왠지 누구와도 진지하게 만나지 않았다. 그녀의 문제라면 술에 취하면 주변 남자들에게 과도하게 애교를 부리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학년 여름 방학에 하빈은 집에 내려갔고, 민종과 수아는 계절학기 수강을 위해 학교에 남아 있었다.
개학 후 민종은 여전히 하빈에게 열렬했지만, 수아의 태도가 달라진 걸 하빈은 느낄 수 있었다.
하빈이 없는 동안 그 둘은 붙어 다녔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것이다.
하빈은 남자친구로 민종을 잃은 건 슬프지 않았다. 민종에게서 나는 수아의 향수 냄새를 간혹 맡을 수 있었고, 그들의 이별이 멀지 않았음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다만, 민종은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어느 이상 자신을 받아주지 않았던 하빈을 탓했다.
결구 남자들은 하빈이 생각했던 그 이상의 존재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남자의 사랑을 갈구하면 하빈의 엄마처럼 비참해질 수 있다고 하빈을 믿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아빠는 감성적이고 외로운 엄마를 보듬어주지 않았다. 늘 공부 잘하고 완벽한 오빠 역시 엄마에게 차가웠다. 하나밖에 없는 딸에게 항상 기대려고 하는 엄마가 어느 순간부터 하빈은 부담스러웠다.
숨 막히는 집안의 공기에 하빈의 유일한 탈출구는 근처 살고 계신 할머니 댁이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는 늙은 리트리버가 한 마리 있었다. 하빈이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 강아지는 모든 걸 이해한다는 듯 그녀에게 발을 내어 주었다.
하빈에게 주는 말없는 강아지의 위로는 그녀가 주변 사람들의 감정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것이 아마 그녀가 수의사가 되고 싶었던 유일한 이유였을 것이다.
무조건적인 애정과 이해. 그것이 동물이 사람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