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안녕하세요?"
평소 병원을 자주 들리던 강아지 솜이네 보호자가 솜이와 같이 하빈의 진료실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솜이도 안녕!"
채빈은 커다란 크림색 리트리버인 솜이를 반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솜이는 헐떡이며 하빈에게 다가와서 손을 핥기 시작했다. 이제 2살이 되어가는 암컷인데 사람을 워낙 좋아하고 병원에서도 아주 모범적인 손님이었다.
"선생님, 근데 우리 솜이가 좀 이상해요. 여태까지 한 번도 으르렁대거나 사나운 행동을 한 적이 없었는데, 어제 갑자기 우리 아들한테 으르렁대더라고요. 왜 그럴까요?"
솜이 보호자는 신나서 헐떡거리는 솜이를 쓰다듬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 그랬어요? 솜이는 여기서도 항상 순하게 굴던 아이인데 왜 그러지? 원래 아드님이랑 솜이가 잘 지냈어요? 가끔 남자애들은 강아지랑 험하게 놀기도 하는데. "
하빈이 일상적인 질문을 던졌다.
"평소에는 우리 아들 학교 갔다 들어오면 솜이가 제일 먼저 신나서 달려가고 그랬어요. 근데 어제 내가 아들이 학교 끝나고 가야 되는 학원은 안 가고 피시방 간 걸 알고 좀 혼내주려고 했죠. 근데 내가 뭐라기도 전에 솜이가 아들한테 으르렁거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깜짝 놀라서 솜이를 불렀더니, 나한테 와서는 평소처럼 굴더라고요."
이어서 솜이 보호자는 말을 이었다.
"내가 중학생 사춘기 아들이 말도 잘 안 하고 방에만 틀어박혀 있고 좀 우울한 것 같아 남편이 싫어하는데도 우겨서 솜이를 키우기 시작한 거라, 우리 남편이 솜이가 그러는 걸 보게 되면 난리가 날 거예요."
하빈은 강아지 때부터 보아오던 순한 솜이가 갑자기 다른 성향을 보이는 이유가 뭘까 생각에 빠졌다.
"혹시 최근에 집에 환경이 달라지거나 뭐 바뀐 게 있나요?"
하빈의 말에 보호자는 잠시 생각하더니, 뭔가 떠오른 듯 말을 이었다.
"다른 건 달라진 건 없는데, 한 달 전인가 다른 병원에 잠깐 사료 사러 들렀다가 새로 나온 개냄새 덜나게 하는 약이 나왔다고 안전한 거라고 해서 하나 사서 먹이기 시작했는데."
하빈도 얼마 전에 약품 회사 직원한테 들은 적이 있다. 사료랑 같이 매일 먹이면 강아지 몸냄새가 없어진다는 피지 분비를 줄이는 약인데 최근에 판매하기 시작했다. 하빈은 새로운 약이 시판되면 아무리 부작용이 없다고 광고를 해도 막상 사용하면 예상외의 증상도 나타나기에, 최소 6개월 이상 상황을 보고 권한다.
"아 네. 저도 들은 적이 있는데, 나온 지 얼마 안돼서 좀 두고 보려고 했었어요. 뭐 그게 솜이가 그런 이유인지는 애매하지만, 일단은 중단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혹시 우리가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으니, 기본적인 혈액 검사를 오늘 한 번 해보고, 한 이주 정도만 심리적인 안정을 위해 항불안제를 처방해 드릴게요.
만약에 그래도 계속 그러거나 하면 관절 엑스레이를 찍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공격성은 심리적인 불안에서 생기는 행동일 수도 있지만, 가끔 통증 때문에 사나워지는 애들도 있거든요. 솜이가 어리긴 하지만 대형견들은 어릴 때부터 관절이 안 좋은 애들도 있어서요. "
하빈의 말에 솜의 보호자는 동의하고 솜이를 병원에 잠깐 맡기고 시장을 보러 간다며 나섰다.
하빈은 솜이를 쓰다듬으며 솜이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 착한 솜이가 왜 그랬을까? 오늘 조금만 검사해 보자."
솜이는 꼬리를 흔들며 하빈에게 점프하며 신나 했다.
"저기 채 선생. 오늘 또 세미나 가는 날인가?"
진료실 문이 열리며 정석선배가 들어왔다. 하빈은 요즘 선배를 보면 자신도 모르게 그때 수정 씨와 같이 있던 선배모습이 떠오르곤 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솜이가 선배에게 몸을 돌리며 으르렁대기 짖기 시작한 것이다.
하빈은 깜짝 놀라 솜이의 목줄을 잡으며 진정시키려다 격렬하게 짖는 솜이가 하빈은 손가락을 물었다. 물린 하빈의 손가락에서는 피가 흘렀고, 숙이 간호사가 들어와 솜이를 잡고 하빈은 응급처치를 했다.
솜이가 워낙 과격하게 짖는 통에 선배는 하빈을 데리고 진료실을 나갔다.
잠시 후 하빈이 진료실로 들어왔을 때 솜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꼬리를 흔들며 하빈을 반겼다.
사람에 따라 공격성을 보이는 솜이를 하빈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날 정석 선배를 제외한 누구에게도 솜이는 사납게 굴지 않았다.
그날 저녁 세미나에 온 하빈은 몸이 이상한 걸 느끼기 시작했다. 열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몸이 떨리고 머리가 멍한 느낌도 들었다. 몸이 물속에 있는 것처럼 가라앉는 느낌마저 들었다.
오석과 수아는 세미나에 열중하느라 옆에 있는 하빈을 상태를 알지 못했다.
세미나에 도저히 집중할 수 없었던 하빈은 몰래 자리를 빠져나와 일층 로비에 앉아 있었다.
"괜찮아요?"
갑자기 옆에서 들려오는 남자 목소리에 놀라 몸을 돌리니 큰 키의 보검에 옆에 서 있었다.
"아 그냥 좀 어지러워서요. 금방 괜찮아질 거예요. 들어가세요."
힘없는 하빈의 말에 보검은 그녀의 옆에 앉았다.
"괜찮아 보이지 않는데. 얼굴도 창백하고."그는 하빈의 이마에 손을 대어보며 말했다.
"열도 좀 있는 것 같은데. 들어가서 하빈씨 남자친구 불러올까요?"
"아니네요. 아무래도 그냥 택시 불러서 집에 가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감기기운이 있는 것 같아요."
"내가 데려다줄게요. 오늘은 차 가져왔어요."
보검의 말에 하빈은 아니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점점 기운이 빠져 몸을 일으키기도 힘들었다.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하빈은 꿈을 꾸는 것 같은 이상하게 몽롱한 상태로 앉아 있었다. 옆의 남자에게 도움을 받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는데, 지금은 그를 거부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어딘가에서 울리는 진동소리에 하빈은 정신이 들었다. 가방 속에 있는 그녀의 전화기가 울리고 있었다.
"야 너 어디야?"
전화를 받자마자 오석의 다그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미안. 내가 갑자기 몸이 너무 안 좋아서 집으로 가는 길이야. "
"깜짝 놀랐잖아. 화장실 간 줄 알았는데 안 와서. 알았어. 집에 들어가면 톡해."
전화를 끊고 나서 주위를 둘러보니 차는 어느새 하빈의 집 앞에 서 있었다.
"깼어요? 너무 곤하게 자고 있어서 잠깐 기다렸어요."
그제야 그녀는 옆자리의 보검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에게서 나는 옆은 향수 냄새. 희미한 병원 소독약 냄새. 그리고 그에게서 나오는 위험한 느낌.
하지만, 그를 가까이서 보니 그가 확실히 정말 잘생긴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의 깊은 큰 눈동자는 그를 더욱 매력적인 사람으로 보이게 했다. 몽롱한 상태의 하빈은 정신을 차리려 애쓰며 말을 했다.
"감사합니다. 데려다주셔서. 이제 그만 들어가 볼게요. "
보검은 그녀를 오피스텔 안의 집까지 데려다주려 했지만, 그녀는 끝까지 괜찮다며 혼자 들어갔다.
하지만, 밖에서 지켜보던 그는 5층의 한 집에 불이 켜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
보검이 원하기만 한다며 세상의 대부분의 여자들은 그에게 넘어올 거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그가 병원에 출근하기 시작하면서 그를 한 번이라도 더 보려고 작은 일로도 병원을 방문하는 여자보호자들로 병원의 매출이 30프로 이상 증가했다며 그가 다니는 병원 원장은 그를 어떻게든 오래 잡아두려 했다.
연예인 뺨치는 그의 외모는 어디 가나 눈에 띄었고, 심지어 병원에서 드라마 촬영이 있었던 때에는 드라마 피디가 그에게 엑스트라로 연기를 해주길 원할 정도였다.
그에게 다가오는 많은 여자들을 가끔 만나기도 하고, 때론 나중에 문제없을 만한 사람들과 일회용 잠자리를 하기도 했지만 그가 계속 곁에 두고 싶을 만한 여자는 졸업 이후에 찾지 못했다. 하빈을 만날 때까지는 말이다.
그녀는 그가 원하는 깔끔한 외모에 수수하지만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화장을 진하게 하거나 화려한 옷을 입지 않아도 눈에 띄는 큰 키에 슬림한 몸매, 그리고 조용하지만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그녀의 옆에 있는 남자친구는 보검에게는 고려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들의 관계는 뭐랄까 연인이라기보다는 친구 같은 느낌을 주었다. 학교 때부터 오랜 기간 만나서여서일 수도 있고, 더 이상 서로 크게 애정을 느끼지 못해서 일수도 있다.
보검은 어려서부터 그가 원하는 걸 갖지 못한 적이 거의 없다. 공부도 잘했고, 그러면서 잘생기고 운동도 잘하는 그를 바디가 부러워했다. 나름 부유한 환경의 그의 집에서 경제적으로도 충분한 서포트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그에게 어울리는 여자를 만나 자신의 집과 다른 완벽한 가정을 만들고 싶었다.
그의 아버지는 대대로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약국을 하며 서울에 여러 개의 건물도 소유한 남부러울 것 없는 사람이었다. 다만 보검이 어린 시절 그의 어머니가 병으로 죽자, 그의 보모로 일하던 여자와 눈이 맞아 결혼하여 보검에게 배다른 여동생을 만들어 주었다. 보검은 그런 여자가 자신의 새엄마인 게 죽기보다 싫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일부러 지방의 수의대를 지원해 지금까지 혼자 살고 있었다.
보검의 아버지는 그가 새엄마와 여동생을 극도로 싫어하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억지로 그를 집으로 끌어들이지 않고, 그에게 그가 소유한 한 상가주택에서 머물게 했다. 보검이 새엄마와 여동생에게 최소한의 관계를 유지하는 조건으로 그 건물을 그에게 증여하기로 문서도 작성해 두었다.
그래서 보검은 두 번의 명절과 가족의 생일에는 그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고 겉으로는 예의 바른 태도를 유지했다. 남들이 보기에는 단란한 가족으로 보일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