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빈이 일하는 동물병원은 지하철역에서 십 분 이상 빠른 걸음으로 걸어야 하는 거리에 있었다. 홍대역에 내려 길거리 토스트를 하나 사서 병원으로 걸어가며 초겨울의 쌀쌀한 바람을 맞는다. 병원은 5층 건물의 일층 일부와 이층을 사용했다. 병원을 운영하는 부부 원장은 하빈의 대학 선배이기도 하다. 나이차가 십 년 이상 나지만, 학교 행사에 자주 참여했던 선배들이라 하빈과도 안면이 있었고, 졸업 후 선배의 소개로 이병원에서 일한 지 어느새 일 년이 되어간다.
하빈은 동물을 매우 좋아했지만, 소극적인 성격 탓에 사람들과 많이 부딪혀야 하는 동물병원 일이 처음엔 내키지 않아서, 졸업 후 한 제약회사의 실험실의 실험동물 관리를 하는 일을 했었다. 작은 마우스나 쥐들을 대상으로 새로운 약물을 실험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어서, 실험 설계와 실험을 수행하는 일들에 수의사가 필요하다. 실험 자체는 흥미롭기도 하고 그에 관련한 연구 논문을 참조하고 실험실 선배들과 각자의 시험을 진행하며 데이터를 만드는 일은 혼자 일하는 시간이 많아 좋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실험체를 희생시켜야 하는 실험이 그녀에겐 괴로운 일이 되었다.
어느 날 그 일을 힘들어하는 채빈을 본 한 선배가 한 말이 그녀에게 크게 다가왔다.
"동물을 살리는 일을 하고 싶다면 임상을 할 수밖에 없어."
그 후 채빈은 실험실을 나와 병원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병원의 선배부부는 사십 대 초반으로 대학시절부터 사귄 사이로 졸업 후 결혼을 하고, 여자 선배의 부모님이 사시던 상가 건물에 병원을 차렸다. 일층에는 세 개의 상가가 있는데, 두 개는 각각 네일숍과 커피숍이 차지하고, 나머지 한 상가가 이층의 동물병원과 연결되는 특이한 구조로 되어 있다.
건물의 삼사층은 작은 회사들의 사무실로 사용되었고, 5층은 병원 선배들의 가정집이 위치했다.
원장인 정석 선배는 아주 털털한 호감형의 남자로 미국의 플로리다의 침술학교 과정을 수료하고 침술치료와 재활운동을 도와주는 레이저 치료, 수중치료 등을 담당하고, 부인인 은혜선배는 일반 진료와 수술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최근에 건강이 안 좋아지면서 채빈을 고용하게 되었다.
동물병원 이층은 정석선배가 하는 한방치료와 재활치료 시설과 일반진료 시설로 나눠져 있고, 일층은 리셉션과 여러 판매용 사료나 액세서리가 진열되어 있다.
은혜선배는 원래부터 몸이 좋은 편은 아니었는데, 병원일의 스트레스로 인해 신장질환이 생겨 극도의 안정이 필요했다. 채빈이 처음 일하기 시작했을 때는 일주일에 삼일은 나와 하루종일 채빈을 트레이닝하고 진료를 도와주었는데 이제는 일주일에 하루정도 채빈과 케이스 리뷰를 하고, 운동을 가거나 집에서 쉬곤 했다.
병원에는 선배 부부 외에 성격 좋은 실장님인 혜란이 병원 전반을 관리하고, 수정과 숙 이 두 명의 간호사가 진료를 도와주고 있었다.
채빈은 어느새 병원에 다다랐다. 일층으로 들어갈 수도 있지만, 건물의 옆쪽에 위치한 통로를 이용하면 병원 이층으로 바로 들어갈 수 있다. 병원은 오전 9시에 오픈하지만, 채빈은 항상 삼십 분 정도 일찍 병원에 도착해 느긋하게 커피 한잔을 마시며 하루를 준비하는 걸 즐기곤 했다. 이층 유리에서 커피를 마시며 밖을 내다보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한다.
그러다 혜란 실장님이 9시 십 분 전쯤 와서 병원문을 열고 실내의 모든 라이트를 켜면 다시 사람들과의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또 혼자 즐기고 계시네. 우리 채 선생님?"
혜란의 친근한 목소리가 일층과 이층을 연결하는 계단에서 들려온다. 혜란은 사십 대 중반이지만 대학생인 외아들은 벌써 군대에 가 있고, 성격만 좋은 남편은 근처 건물에서 건물 관리인으로 일한다. 그녀는 원래 이 병원의 손님이었는데, 초기부터 병원에 단골손님으로 지내다, 두 원장님들의 권유로 같이 일하게 된 지 벌써 7년이 다 되어간다고 했다. 원래 숫기도 없고 소극적인 채빈을 다독거려 주고, 진료할 때도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 좋은 분이기도 했다.
"실장님 안녕하세요?"
채빈은 웃는 얼굴로 수줍게 실장님을 반겼다.
"채 선생님 오늘도 수술 있지 않아?"
" 아 네. 오늘 고양이 중성화 두 마리 있어요. 멍이랑 뚱이요."
" 채 선생님 이제 일한 지 일 년인데, 수술도 다하고, 이제 내과 진료도 크게 부담안느 끼는 것 같던데. 대견하네"
실장님의 칭찬에 채빈은 얼굴을 붉혔다.
"근데 실장님, 오늘은 김치찌개 드셨나 봐요."
"역시 채 선생 코는 역시 개코야 하하. 아니 아무리 내가 요리를 했어도 옷도 갈아입고 여기 걸어오는데 십 분은 넘게 걸리는데 아직도 냄새가 나?"
채빈의 특이한 점 중 하나는 그녀가 냄새에 아주 민감하다는 것이다. 일층에 강아지가 변을 보면 이층에 있다가도 냄새를 맡고 내려오기도 할 정도니 말이다.
그런데 그녀는 냄새뿐만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느낌이나 감정도 남들보다 민감하게 느끼는 경향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아주 내성적인 성격이라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는 책을 읽고 혼자 생각하는 시간이 많았고, 주변 사람들을 관찰하는 게 습관이 돼서 나름 학습에 의한 것일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병원일을 하면서 동물을 진료할 때도 그들의 감정을 자신도 모르게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들이 소아과를 갔을 때나 어른들이 치과에서 치료를 받을 때 느끼는 공포심과 비슷하게, 동물병원은 개나 고양이들에 무서운 공간이기도 하다. 병원에서 나는 냄새나 소리가 사람들보다 발달된 동물들의 후각이나 청각에 더 강렬하게 느껴지는 일은 아마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동물들도 각자 다른 성격이나 성향을 가진다. 병원에 와서 무서우면 그냥 움츠러들어 얼어버리는 동물들도 있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공격적인 되는 동물들도 있다.
그래서 아무리 베테랑이 수의사라 하더라도 개나 고양이에게 한 번도 물리지 않는 경우는 드믈다.
그런데 채빈은 그들을 진료하면 그들의 태도나 울음소리에서 그들의 감정을 느끼곤 했고, 공격적인 상황에 대비를 할 수 있었다. 동물들의 상태를 잘 파악하고 대응하면서 하는 진료는 다른 수의사들과는 비교되는 보호자들과 사교적이지 않아도 진료를 잘할 수 있는 그녀의 무기가 되었다.
"채 선생님, 안녕하세요?" 간호사 중 주로 정석선배의 진료를 도와주는 간호사 수정이 다가왔다. 수정은 이십 대 초반의 귀여운 스타일이고, 하빈의 진료를 도와주는 간호사 숙은 좀 더 털털한 성향의 아가씨이다.
"안녕하세요? 수정 씨"
"어, 채 선생 좋은 아침!" 크고 우렁찬 목소리의 정석선배가 등장했다.
"아 원장님 안녕하세요? 오늘도 운동 다녀오세요?"
"그럼! 운동은 나의 삶의 일부야. 하하" 정석선배는 반년 전부터 아침 일찍 일어나 헬스장에 가서 운동을 한 후 출근을 한다. 운동을 하고부터 허리 통증이 좋아졌다고 하루도 빠지지 않는다.
"안녕하세요? 원장님?" 수정이 원장님에게 다가가면 인사했다. 정석선배도 수정을 반갑게 맞이하며 둘은 재활 진료실로 향했다.
정석선배와 수정간호사가 채빈옆을 차례로 지나쳐 가자 채빈은 그들에게서 같은 향의 샴푸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수정씨도 정석선배랑 같은 헬스장을 다니나?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은 없는데. 그리고 둘이 같이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채빈은 별로 알고 싶지 않았지만, 이상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보검은 공중보건의 생활 3년을 마친 후 동물병원에서 일을 시작했다. 처음 일한 병원은 원장이 두 명에 수의사도 여러 명인 아주 큰 병원이었다. 이 병원을 선택한 이유는 강남에 위치한 최신식의 건물과 장비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러 명의 수의사가 있다 보니, 각자에게 주어지는 진료가 차별화되고 분화된다는 것이다. 원장 한 명과 한 수의사가 독점적으로 수술을 도맡아 하고, 다른 원장과 보검을 포함한 두 명의 수의사는 내과 진료만을 보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진료 경험이 없어서 내과에 집중하여 진료하는 게 재미도 있고 보람도 들었지만, 수술은 전혀 할 수 없는 상황이 점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끔 수술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건의도 해보았지만, 보검은 수려한 외모에 점점 늘어나는 진료 손님들 때문에 원장은 가급적 그가 더 많은 손님들과 상담을 하길 원했다.
동물병원은 여성 보호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탓에 보검의 인기는 날로 높아졌고, 그는 병원에서 가장 인기 있는 수의사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진료의 큰 부분이기도 한 수술을 포기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고, 그는 다른 소규모의 병원으로 이직을 하게 되었다.
새로운 병원에서는 원장과 그 두병이 진료를 담당했기에, 그는 그가 원하는 수술도 시작할 수 있었다.
같이 일하는 간호사나 미용사뿐만이 아니라 병원에 오는 손님들도 키 크고 잘생긴 수의사인 보검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보검은 어렸을 때부터 항상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여자들이 그를 좋아하는 건 어쩌면 그에게 그냥 당연한 일일 뿐이었다.
보검은 아직도 현진을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오르곤 했다. 완벽한 자신에게 어울리는 상대가 될 수 있었는데 그녀가 그 기회를 다 망쳐버린 것이다.
아직 그는 현진에게 비길만한 상대를 찾지 못하고 시간만 흘러갔다. 퇴근 후 혼자 술집에 있으면 자연스럽게 여자들이 다가왔고 그들은 그에게 일회성 이상의 즐거움은 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