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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향 Dec 25. 2023

목욕탕에서 생긴 일

어머, 이건 써야 돼!

"초원아, 목욕탕 갈래?" 토요일 오전  열 시 반이다. 주말마다 게으름을 떨쳐내지 못하는 나. 오늘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막내를 불렀다. 크리스마스를 깨끗한 몸으로 보내야겠다. "진짜? 나 갈래." 아이가 좋아한다. 듣자마자 화색이 돈다. 물을 좋아하는 아이가 여러 번 졸랐는데 집에서 씻으라고 했었다. 오후까지  티브이나 보며 늘어져 있는 낙제점 받을 늙은 엄마라 미안해.


요즘 경기가 안 좋은 게 확실하다. 탈의실이 춥다. 다른 손님들도 왜 이리  춥냐고 난리다. 바닥 난방을 안 하는지 바닥도 차갑다. 코로나 이후 목욕하러 오는 손님이 줄어들어 수지가 맞지 않는다더니 주인이 많이 아끼나 보다. 여름방학 때 한번 오고 거의 넉 달만이다. 예전엔 일주일에 한 번씩 목욕하러 가는 게 일상이었는데 어느 때부터인지 재미있는 체험용으로 바뀌었다.


목욕탕 안으로 들어갔더니 예상외로 손님이 많다. 대부분 할머니다. 바글바글해서 앉을자리가 없다. 몇 군데 비어있는 곳은 자리를 맡아 놓고 탕에 들어간 듯하다. 기다리다 겨우 자리를 잡았다. 막내가 자꾸 힐끔힐끔 쳐다보며 웃는다. "야! 보지 마!" 어린애라 해도 부끄럽다. 우리 딸은 아빠를 닮아서 길쭉길쭉 늘씬하게 크고 있다. 얼마나 다행인지.


샤워 먼저 하고 세신을 신청했다. 딸아이까지 밀어주려면 너무 힘들 것 같았다. 3만 원을 계좌이체했다. 안 들여도 되는 돈이지만 이럴 때 쓰려고 버는 거라고 위안하며 큰맘 먹었다. 때를 민 지 오래되어서 너무 많이 나올까 봐 걱정된다. 창피하니까 미리 애벌 때밀이를 해 둔다. 아, 이것도 힘들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검은색 속옷을 입은 세신사 두 분이  들어온다. 적어도 육십 대 중반 이상은 돼 보인다. 힘이 있을까 걱정된다. 눈치껏 부르기 전에 세신존으로 갔다. 열쇠 걸어놓으라고 했을 때 내 앞에 예약한 것이 없었으니 내가 1번이다. 두 분이서  내가 사용할 자리를 정하는 것 같다. 2번도 있나 보다. 아가씨 한 명하고 애기 엄마 한 명이라고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2번도 들어와서 옆 배드에 나란히 엎드린다. 아가씨라더니 나이가  많이 들어 보인다. 고개를 어디로 둘 지 불편하다. 반대쪽으로 돌리고 눈을 감았다.


세신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딸아이가 "엄마!"하고 부르며 들어온다. 이 아이는 여러 가지가 신기한가 보다. 여기는 또 뭐 하러 들어온담. "저리 가서 놀고 있어." 하고 얼른 내쫓는다. 세신사가 웃으며 "엄마가 벌써 보고 싶었어?" 친절하게 말한다.


아이가 나가고 나서 "아가씬 줄 알았더니  저렇게 큰 애가 있네요?" 한다. 응? 내 귀를 의심. 아까 말한 그 아가씨가 나였다고? "아이고, 뭔 소리세요. 대학생도 둘이나 있어요." 잘못 봤겠지만 기분은 좋다. "진짜요? 그렇게 안 보이는데? 하긴 나도 대학생 손녀가 둘이나 있는데 사람들이 놀라요. 그리 안 보인다고. 대학교 4학년, 1학년. 우리 딸이 마흔네 살 이거든." "네. 젊어 보이셔서 그러겠네요." 대충 맞장구친다. "몇 살이요?" 하고 내게 묻는다. "우리 나이로 쉰 하나요." "그렇게나 많다고? 여그 손님 쉰 하나라 하냐. 겁나게 젊어 보이네." 옆 동료랑도 나눈다. "아유, 그래? 아가씬 줄 알았더니만."


비실비실 웃음이 나온다. 눈이 어두운 두 할매가 인정해 준 게 뭣이 중허다고. 한 다섯 살 아래로 사십 대 중반쯤으로 보인다는 소리는 간혹 들었지만 쌩얼에다가 적나라한 몸매에 대한 평가라 이건 좀 다르긴 . 우습기도 하지만 기분이 고무된다. 힘든 줄도 모르고 딸아이 몸을 신나게 밀어주고 나왔다. 대중목욕탕에 는 걸 꺼려하는 편인데 끝나고 나면 피부가 보들보들하고 가벼운 게 날아갈 것 같다. 오늘은 특히 더.


집에 와서 남편을 테스트해 봤다. 뭐라 하는지 보자. "어따, 그 아줌마 너무 많이 나갔네. 아가씨 뱃살이 그렇게 많아?"  그러면 그렇지. 진실된 사람 같으니라고. 나도 안다고, 이 사람아. 하긴 아가씨 같다고 아부했어도 거짓을 말한다고 야단이었을 거다. 하하하. 내가 어정쩡하게 웃으니 눈치가 좀 보이는지 "체격이 작아서 언뜻 보면 그럴 수도 있겠네."라며 살짝 수습을 해 보인다. 이미 늦었어. 흥!


갱년기를 지나며 여자는 자주 좌절한다. 건강에 이상이 생기는 것은 물론 체중이 늘고 주름이 지고 피부가 늘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기에 우울을 경험한다. 나 또한 그런 과정을 겪고 있다. 거울을 보기 싫었다. 한동안 우울했을 때 마음과 함께 몸도 무너지는 걸 느꼈다.


공지영 작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에서 나이 듦을 수용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살찐 나도 예뻐하고, 주름진 나도 아껴 주어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점점 망가지는 나를 그저 받아들이자는 것은 아니다. 정갈하게 가꾸고, 움직여 운동하고, 건강한 음식을 먹고, 비싸지는 않아도 어울리는 옷으로 차려입을 것이다. 마음을 가꾸는 것만큼이나 몸을 돌보는 것도 필요하다. 육체는 마음을 드러내는 거울이니까.


눈이 삔 아주머니들이 선사한 즐거운 '아가씨' 에피소드는 내게 활력을 주었다. 몸에 생기가 돌고 의지가 생긴다. 오늘은 오래 기억에 남을 날이다. 나를 아는 이들은 배를 잡고 웃을 것이다. 어이없어서. 뭐 어때? 난 사실을 말한 것 뿐이니 전혀 거리낄 게 없다! 그래도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웃기긴 하다.


어쨌든 '나를 사랑하자! 나는 나 자신으로 아름답다!'라고 주문을 외워본다. 날마다 외우면 세뇌되겠지?


크리스마스네요. 모두들 메리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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