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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향 Dec 31. 2023

내 오래되고 재미없는 친구들

송년 모임

친구들과 술을 마시면 대학 때 내 별명 중 하나인 ‘안줏발’이 소환된다. 소주 반 잔만 마셔도 얼굴부터 시작해서 온몸이 다 불타오르는 데다 심지어 호빵처럼 부어오르기까지 했으니 술은 마시는 시늉만 했다. 대신 워낙 먹성이 좋은 나는 안주를 공략했다. 젓가락을 한번 잡으면 식당 혹은 술집에서 나갈 때까지 결코 놓는 법이 없다. 술값을 아껴서 좋긴 한데 내가 먹은 안주값도 만만치 않다면서 그렇게 불렀다. 술도 못 마시는 주제에 술자리에는 꼭 끼었다. 취하면 가끔 꽐라가 되는 J는 술자리에서 헛소리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멀쩡하게 앉아 있는 사람이 젤 싫다며 내게 찍는 소리를 하곤 했다.     

 

“야, 안줏발! 안주 그만 축내고 한잔 해.” 그녀가 오늘도 나를 구박한다.  ‘어어, 아스팔트가 올라오네?’라는 말로 유명했던 J는 그때도 지금도 술꾼이다. 맥주나 막걸리는 화장실을 왔다 갔다 하며 끝없이 마실 수 있는데 배가 불러서 요새는 소주로 주종목을 바꿨단다. 예전 영암 군수네인가 그 사돈네인가가 공을 들여 멋들어지게 지은 정원이 잘 가꾸어진 넓은 한옥을 사서 술을 즐기며 살고 있다. 술살로 동글동글하다. 국악을 하는 예술가 남편도 사람 좋아하기는 마찬가지인지라 그 멋진 집에는 술손님들이 끊이지 않는다. 인생 부럽게 사는 친구다.     


여하튼 오늘은 근처에 사는 대학 친구 다섯 명이 모였다. 이번에 교육청에서 마련한 교감 워크숍에서 교감 한 분이 '교감'으로 2행시를 짓는다고 했던 일이 생각난다. 운을 띄웠더니 ‘교! 교육장님!’ ‘감! 감사합니다!’ 이러는 거다. 야유를 받고서는 다시 하겠단다. ‘교! 교육과장님!’ ‘감! 감사합니다!’ 또 이러고 있다. 그렇다. 오늘 만난 친구들도 모두 아부에 최적화된 명칭인 ‘교감’ 딱지를 붙여 본 이들이다.  

   

C는 요즘 걷기를 열심히 한다더니 살이 많이 빠졌다. 대학 때 몸무게로 되돌아갔다고 자랑한다. 살이 빠지니 얼굴에 주름이 더 보이지만 건강해 보인다. 그는 장학사, 교감을 거쳐 지금 도교육청 장학관이다. 이제 갓 50인데 엄청 출세했다. 그가 대학 1학년 때 나에게 했던 잊을 수 없는 말이 떠오른다. “송ㅇㅇ, 너는 나중에 분명 후회할 거야. 미래의 네 남편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헐. 되게 친하게 지냈었는데 사귀자고 하는 걸 거절했더니 그가 술자리에서 진지하게 했던 말이다. 창의적이고 샤프하긴 했었다. 적어도 교육장은 하고 퇴임하지 않을까 우리끼리 얘기한다. ‘남자친구로 두기에 너는 눈치가 2프로쯤 부족했어. 지금도 마찬가지야. 미안.’  

    

S는 과묵하고 조용하다. 흰머리가 많이 늘었다. 장학사를 거쳐 큰 학교 교감으로 있는데 초등학교 2학년과 중학교 1학년 아이를 키우고 있다. 아이가 어려서 아내가 퇴근하고 올 때까지 기다리느라 오늘 모임에도 늦게 왔다. 나도 늦둥이 막내가 6학년이어서 언제 키우나 답답할 때가 있는데 이 집도 한숨이 나온다. 대학 졸업하던 해에 그는 여자친구랑 헤어져 괴로워하고 나는 지금의 남편과 사귈까 말까 고민하던 때 대반동에서 하당까지 걸어오면서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던 유일한 추억이 있다. 술자리에서도 듣기만 하는 이 친구가 제일 많이 말했던 날이다.     


나머지 한 명 K는 오늘도 술이 들어가니 기분이 아주 좋아 보인다. 술자리 대화를 주도한다. 그의 말이 너무 많은 건 아닌지 관리하며 주의를 준다. 내 남편이다. 나랑 결혼하고 싶어서 담배도 끊고 교회도 다니겠다며 차에 성경책도 가지고 다녔다. 신혼 초에 약속을 지키는 듯하더니 지금은 배 째라 하는 거짓말쟁이에다 배신자다.    

 

30년 지기 친구들이 1년에 몇 번  만나서 술잔을 돌리며 삶을 나눈다. 특별한 내용은 없다. 교사 때는 반 아이들, 지금은 교사들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이러나저러나 맨 학교나 교육과 연결된다. 지겨워서 “이제 학교 얘기 그만!” 하고 외치니, “그럼 뭔 이야기 해?”하고 묻는다. “그냥 취미 얘기해.” “밭에서 농사짓는 거 말할까?” “으이그, 술이나 마셔.” 여전히 재미없는 친구들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가고, 누가 봐도 영락없는 중년 아저씨 아줌마가 되었다. 벌써 오십, 지천명의 나이가 되었다니 신기하다. 따스한 햇살에 한들한들 불어오는 봄바람만 있었을까. 비바람, 눈보라 치는 날도 있었으리라.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건 나 혼자만을 위해 이기적으로 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너나 나나 잘 견뎌왔고 수고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모두들 얼굴에 욕심이 없고 아직도 순진해서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론 한숨이 나오기도 한다.     


다가오는 새로운 해에는 또 어떤 일들이 내게 올까? 어떤 새로운 인연을 만나게 될까? 기대하고 소망하지만 오래된 것, 묵은 것들의 편안함과 검증된 진정성을 이기기는 힘들 것이다.    

  

오늘은 다른 날보다 술을 많이 마셨다고 J에게 칭찬을 받았다. 선방했다. 놀랍고 신박하고 가슴 떨리지는 않지만 포근하고 따뜻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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