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이 필요 없는 세상
'일상의 글쓰기' 글감-[의사]
막내의 왼쪽 눈꺼풀 윗부분에 난 작은 뾰루지가 조금 부풀어 올랐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만져 보니 속에 염증이 생긴 것 같다. 예전에 남편이 직접 짰다가 세균에 감염된 적이 있어서 좀 귀찮아도 병원에 들러 보기로 했다. 아이 눈꼬리에 있는 비립종까지 이참에 없애야겠다.
집 가까운 곳에서 유일하게 전문의가 운영하는 피부과를 검색했더니 아홉 시부터 접수를 시작한단다. 많이 기다린다고 해서 서둘러 여덟 시 30분에 도착했지만 벌써 앞에 열 명이나 있었다. 피부 레이저를 받는 예약 환자까지 더해지면서 대기 시간이 길어진다. 한 시간 반이 지나자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냥 다니던 동네 피부과로 갔어야 하나 후회됐다.
드디어 열 시쯤에 차례가 왔다. 젊고 잘생긴 의사가 아주 친절하게 맞았다. 돋보기 같은 걸로 들여다보더니 “색깔이 좀 이상한데 2차 병원으로 가셔야겠어요.” 이러는 것이다. 당황해서 “2차 병원이요?” 하고 되물었다. “거기가 어딘데요?” “아, 제가 진료의뢰서를 써 드릴 테니 조대 병원으로 가세요.” “거기까지요? 왜요?” 이게 뭔 일인가 싶어 말이 잘 안 나왔다. 이유는 정확하게 말하지 않으면서 칼을 대서 안의 것을 빼내야 할 수도 있다는 식으로 말했다. 그러니까 그게 짠다는 거 아닌가? 답답했다. 자기도 전문의인데 왜 못 하지? 큰 종기도 아니고 좁쌀만 한데. 저 안의 것이 악성 암이라도 되나? 집에서 해결하려다가 가벼운 마음으로 왔는데 날벼락 맞은 기분이다. 설명이 없으니 불안하다. 전대 병원은 전공의가 다 파업하고 있어서 진료 받기가 어렵고 그나마 조대 병원은 조금 더 나을 것이라며 미리 전화로 예약하라고 일러 준다. 날짜를 빨리 잡지는 못할 것이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진료는 단 몇 마디로 끝났다. '3분 진료'라는 비꼬는 말이 있지만 30초 진료도 많은 게 현실이다.
비립종을 제거하려고 또 30분 넘게 대기했다. 끝나고서 간호사가 눈 주변에 아주 작은 비립종이 서너 개 더 있는데 다음에 오라고 했다. 아니, 발견했으면 말하고 기왕 하는 김에 같이 하지 이걸 나중에 또 반복하라고? 갑질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아까운 두 시간 반 동안의 성과가 미미했다. 다신 안 온다.
어차피 아이 데리고 운전해서 갈 사람은 남편이라서 여차저차했으니 전화해서 진료 시간을 잡으라고 부탁했다. “광주까지?” 황당해하면서도 내가 화낼까 봐 알았다고 한다. 잠시 후 전화가 왔다. 거기도 의사들 파업으로 예약을 언제 잡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했단다. 어쩔 수 없이 남편이 목포에 있는 ‘차 피부과’로 데리고 가보기로 했다. 나이 지긋한 의사가 말이 좀 거칠기는 해도 진료를 잘 본다. 다시 연락이 왔다. 그분은 “고름 들었네.” 하더니 바로 짰다고. 연고와 3일 치 약을 받아 왔단다.
좀 어이가 없다. 어떤 의사 말이 맞는가? 차 피부과 원장이 맞다면 왜 첫 번째 병원에선 처치를 안 해 줬을까? 겉으로만 보고 2차 병원으로 가라니. 본인이 치료할 수 없었다면 전문의라고 하면 안 되는 것이고, 피부 미용 시술처럼 돈이 안 되고 귀찮기만 해서라든가 책임지기 싫어서였다면 통탄할 일이다. 게다가 원치 않았던 진료의뢰서 5200원짜리는 써보지도 못했다. 제대로 된 진단과 진료를 받을 수만 있다면 광주까지 바로 달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곳의 의사들은 파업하는 중이었다. 작은 염증으로도 기분이 이럴진대 생명이 걸린 환자듵은 말해 뭣하랴.
카뮈의 소설 <페스트>에서 목숨을 걸고 전염병과 맞서는 의사 리외는 “페스트와 싸우는 일은 영웅주의와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성실성의 문제입니다.”라고 말한다. 성실성이 뭐냐고 다시 묻자 “내 경우에 그것은 자기가 맡은 직분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요즘에 읽고 있는 책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의 저자 정재찬 교수는 위의 내용을 인용하며 ‘의사뿐만 아니라 직업을 가진 누구나 자기의 직업과 직분의 본질을 완수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누구나 영웅이어서 영웅이 필요 없는 세상일 것’이라고 아쉬워한다.
너무나 맞는 말이다. 리외처럼 목숨을 걸라는 게 아니다. 의사든, 교사든, 어떤 직업인이든 업의 본질을 지키는 것, 그것이 꼭 필요한 세상이다. 다행히 막내의 눈꺼풀은 아물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