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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향 May 04. 2024

남편의 정원

일상의 글쓰기 - 글감[천국]

부엌에서 들리는 뚝딱뚝딱 소리에 번쩍 눈을 떴다. 머리맡에 있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앗! 알람이 울려야 할 시간보다 20분이나 더 지났다. 빛의 속도로 씻고, 말리고, 화장하고, 옷까지 입었다. 어라, 아직 시간이 남았네.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좀 떨어지기는 해도 평소보다 빠르다니, 역시 인간의 능력은 대단해. '오늘의 날씨'까지 검색하고 나가면서 보니 남편이 마늘종을 볶고 있다. 아침부터 부지런하군. 어제도 밭에 들렀다 밤늦게 돌아왔는데 말이야. 요새 본인이 거둔 작물로 열심히 요리한다. “아침 먹고 밭에 가는데 자기도 끝나고 올랑가?” 근로자의 날이라 학교도 재량 휴업을 했단다. 부럽네. “이따 봐서.” 현관문을 닫으며 도도하게 대답했다. 일단 튕겨야 값이 올라가는 법.


집에서 밭까지는 훨씬 멀지만 내 근무지에서는 12-3분밖에 안 걸린다. 해남 금호 방조제를 지나면 옹기종기 모인 시골집과 수확을 앞둔 양파밭, 막 모종한 고추밭이 여기저기 자리한 금호 마을에 이른다, 푸른 물결이 남실거리는 청보리밭에 이르면 왠지 차창 밖으로 손을 내밀어 바람을 느끼고, 눈을 감은 채 시골 공기를 들이마셔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산길을 넘어가면 밭으로 내려가는 100여 미터의 울퉁불퉁한 길이 나타난다. 여기서부터는 거북이 운전을 해야 한다. 남편 후배의 자동차처럼 머플러가 터지지 않으려면. 드디어 눈앞에 날씨에 따라 색깔이 바뀌는 금호호가 넓고 시원하게 펼쳐진다. 둥글게 돌아가는 호수 너머로 초록 들판이, 그 뒤로 멀리 낮은 구릉이 자리하지만 마치 하늘과 들판이 맞닿은 것처럼 보인다. 빨리 드러누워서 파란 호수와 하늘이 온통 눈에 담겨오는 풍경을 만끽해야지.


3월에 쪽파와 대파를 캐러 따라온 이후에 거의 두 달 만이다. 흙을 높이 돋우어 언덕을 만들고 잔디를 깔아 놓은 밭 위쪽에 여유롭게 쉴 수 있는 컨테이너 농막이 기다리고 있다. 들어가는 길과 농막 주변에서 홍가시, 사철, 남천, 세이지와 로즈메리가 손님을 맞이하고, 나중에 그물 침대를 걸 후박나무와 가을에 예쁜 색감을 더할 은행과 단풍나무도 반긴다. 엄청 예쁠 것 같은가? 묘목이 아직 어려서 눈을 크게 떠야 보인다는 게 함정이다. 지금은 밭에 돈만 심고 있다고 보면 맞다. 저기 남편이 보인다. 지난주에 고구마순을 심었다더니 부족했는지 좀 더 보태고 있다. “안 도와줘도 돼?” 예의로 한 번은 물어봐야지. “응, 나는 까맣게 탄 여자보다 안 도와주고 하얀 여자가 더 좋네. 커피나 마시며 쉬어.” 맘에 꼭 드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대답이다.


호박, 오이, 가지, 토마토, 대파, 참외, 수박 모종을 새로 심었고 상추와 깻잎, 부추는 저절로 자라서 옮기기만 했단다. 올해는 고추를 많이 따서 말려 보겠다더니 역시나 꽤 많은 이랑을 차지하고 있다. 이르게 심은 감자는 4월 초에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 영향이 컸는지 싹을 틔우지 못한 데가 군데군데 눈에 뜨인다. 마늘과 양파는 추운 겨울을 이겨 내고 튼튼하게 자라 밑이 잘 들었다. 엄마가 좋아하겠다.


자두, 복숭아, 단감, 대봉, 대추, 캠벨 포도, 샤인머스캣, 무화과도 더하면 30그루 가까이 커 간다. 심은 지 2년밖에 안 되었지만 복숭아와 무화과는 올해 몇 개 따 먹을 수 있겠다. 포도는 7년 근이라서 작은 송이가 솎아 내야 할 만큼 달렸다. 제일 반가운 것은 딸기다. 작년에는 조금 맺혔다가 거의 썩어 버렸는데, 올해는 옆으로 많이 퍼져서 군락을 이루고 열매가 다닥다닥 달렸다. 신기해서 작은 바구니를 들고 내려갔다. 빨갛게 익은 것이 금세 절반이나 찼다. 하우스에서 난 것보다는 작고 단단하다. 한입 베어 물었더니 새콤한 즙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5월에 꽤 거둘 것 같다. 동물 친구가 낼름 다 먹기 전에 어린 조카들이 와서 함께 따고 맛보면 좋겠다.


일을 마친 남편이 “오늘 농막 정리하고 청소했어. 자기가 온다니까 꼭 장학 지도 받는 느낌이어서.” 이런다. 요새 농담 실력이 더 늘었다. 쿡쿡 웃으며 검사하는 시늉으로 화답해 주었다. 비록 중고 제품투성이지만 없는 것 빼곤 다 있다. 에어컨, 전자레인지, 전기장판, 캠핑용 조리대, 펜트리까지. 잔디 마당에 캠핑 의자와 탁자를 내놓고 앉아 불을 피워 삼겹살을 구웠다. 칙칙 돌아가는 스프링클러 소리를 음악 삼고 저녁 공기 냄새를 맡으며 신선한 채소를 곁들인 둘만의 만찬을 즐겼다. 내일 쉰다면 자고 가도 좋으련만. 하늘이 맑으면 밖에 누워 쏟아질 듯한 별과 함께할 수도 있는데, 아쉽다.


남편은 자신만의 휴식처를 찾은 듯하다. 벌써 3년 차 농부다. “몇 년 더 지나면 이곳이 우리 가족의 정원이자 쉼터가 될 거야.” 평상과 데크, 아궁이를 뚝딱뚝딱 만들고 묘목 하나하나 제 손으로 가꾸는 부지런한 그가 꿈을 꾼다. “꽃도 많이 심어 줘. 수국이랑 데이지도.” 내 의견도 슬쩍 얹는다. 일이 너무 많아서 후회되지 않느냐고 물었다. 힘들지만 재미있단다. 흙 밟고 땀 흘리고 거두고 나누고, 멋진 경치를 보며 쉬는 시간이 더없이 좋다나. 그의 말처럼 골프하는 것보단 나은 것 같지만 이제 점점 자외선에 얼굴이 새까매지고 기미가 덮일 것이다. 안타깝다. 빨리 늙을까 봐 걱정된다. 나도 하얀 남자가 좋은데.


그래도 이곳에서 행복하다니 어쩌랴. 빈자리나 채워 줘야지. 책 읽고 우아하게 음악 들으며 커피만 마셔 줘도 천국이라니, 가끔 나타나 이쁘고 얄미운 천사가 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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