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12월 19일, 금요일
# 광화문 찬가
아침 출근길에
지하철 5호선 을지로 4가역 4번 출구에서
미리 내려 창경궁로를 따라 약 70~80미터쯤 걸으면
청계천 배오개다리가 나온다.
청계천 산책길은 동쪽 끝 청계광장을 향해
왼쪽과 오른쪽, 두 갈래로 나뉜다.
왼쪽은 폭 2~3미터 남짓한 우레탄 길이고,
오른쪽은 3~4미터 폭의 콘크리트 포장 위에
도색만 한 산책로다.
배오개다리 밑에서 광화문의 청계광장까지는
약 2킬로미터 거리인데
출근 복장 그대로 슬로 조깅을 한다.
겨울철이기도 하고,
1킬로미터에 9분 정도의 속도로 달리다 보니
땀이 날 정도는 아니다.
차가운 기온 덕분에 하루를 시작하기에
적당한 리듬이다.
연말을 맞아 청계천에서는
2025 서울빛초롱축제가 한창이다.
청계천을 따라 광화문광장까지 이어지는
화려한 빛 조형물들이 설치되어 있다.
낮에 보아도 충분히 멋지지만,
해가 지고 조형물마다 불빛이 들어오면 풍경은
전혀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며칠 전에는 이 축제를 즐기기 위해
퇴근 후 딸과 아내와 함께 청계천을 걸었다.
같은 길이었지만,
가족과 함께한 야간의 청계천은
평상시 혼자 걷거나 달리는 아침과는
또 다른 온도를 지니고 있었다.
오늘 점심에는 광화문에서 종로길을 따라
청계4가에 있는 광장시장까지 걸어갔다.
광장시장 안을 한 바퀴 둘러본 뒤,
아침에 달렸던 그 청계천 길을 따라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아침과 점심, 같은 길이지만
시간과 목적이 달라서인지
청계천 풍경도 달라 보였다.
요즘 퇴근 후 아내와의 만남의 장소는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8번 출구가 있는
세종문화회관 서측 소광장이다.
저녁 7시 30분에 <호두까기 인형> 공연이라서,
그 사이 차투리 시간 동안
서촌 한옥마을과
광화문광장에서 열리고 있는
여러 행사들을 둘러보았다.
광화문 북측 광장에서는
광화문 전면을 거대한 캔버스로 삼은
<광화문 미디어파사드 쇼>가 펼쳐지고 있었다.
‘광화, 빛으로 숨 쉬다’라는 주제 아래
국내외 작가들의 미디어아트 작품들이
광화문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고 있었다.
광화문광장 중앙에서는 저녁 6시부터
SBS <생방송 투데이>의 생방송이 진행 중이었고,
사회자 두 사람이 분주히 프로그램을
이끌어 가는 모습을 호기심으로 잠시 지켜보았다.
세종대왕 동상을 중심으로 한 남측 광장에서는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와 함께 역시 연말 특별 행사인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리고 있었다.
연말의 들뜬 공기와
겨울밤의 차가운 공기가 묘하게 섞여
광화문 광장을 수많은 인파들로
뜨겁게 채우고 있었다.
퇴근 시간에 맞춰 아내와 만나
서촌과 광화문 일대를 함께 둘러본 뒤,
7시 30분에는 퇴근한 딸까지 합류해
<호두까기 인형>을 관람했다.
발레 공연은 2019년 러시아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에서 관람한 이후 6년 만이라,
무대가 열리는 순간부터 감회가 새로웠다.
올 한 해 광화문 사무실에서 근무하며,
광화문은 늘 발주처 사무실과 세종대로를 사이에 둔
CM 사무실의 공간적 ‘중심’으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이제는 너무 익숙하고 너무 자주 지나쳐서
중심은 늘 주변처럼 취급되었었다.
그런데 오늘처럼
하루를 아침부터 밤까지 보내면서
광화문이 중심이 되는 의미는
특별한 행사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 안을 걷는 사람이
자신의 속도를 되찾을 때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아침의 광화문은 출근 인파로 분주했지만
서로를 밀어내지 않았고,
도시는 깨어 있었으나 소란스럽지 않았다.
청계천을 따라 흐르던 시간은
시계의 초침이 아니라
발걸음의 리듬으로 흘러갔다.
이 도시는 여전히 바쁘지만,
동시에 천천히 걷는 사람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너그러웠다.
광화문이 가진 힘은 ‘겹침’에 있다.
조선의 시간 위에 근대의 시간이,
그 위에 다시 현재의 일상이 겹겹이 포개져 있다.
누군가는 이 길을 출근길로 걷고,
누군가는 여행자의 시선으로 걷고,
또 누군가는 역사책의 페이지를 넘기듯 걷는다.
같은 길 위에서 서로 다른 목적과 감정이 겹쳐지지만,
그 충돌은 불편함보다는 묘한 균형을 만들어 냈다.
이곳에서의 하루는
늘 직선으로 흐르지 않는다.
걷다 보면 자연스레 멈추게 되고,
멈추다 보면 다시 걷게 된다.
광화문은 서두르지 않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오는 공간이다.
‘여기서 잠시만 더 있어도 괜찮다’고,
‘오늘은 목적지보다 경로가
더 중요할 수도 있다’고
속삭이는 듯하다.
출근 시간과 점심시간, 퇴근 시간,
그리고 밤이 되는 시간대마다 광화문은
서로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모든 얼굴에는 공통된 표정이 있다.
바로 ‘열려 있음’이다.
정치의 광장이었고 집회의 공간이었으며,
지금은 축제와 공연,
산책과 휴식의 장소가 되었다.
광화문은 스스로의 역할을 고집하지 않고
시대가 요구하는 모습으로
자신을 조금씩 내어주었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개인의 하루가
도시의 시간과 자연스럽게 포개진다.
가족과 함께 걷는 저녁의 광화문에서는
개인의 기억이 도시의 기억과 맞닿는다.
아이의 웃음소리와 오래된 건축물의 실루엣이
같은 프레임 안에 들어오고,
오늘의 추억은 내일의 일상이 될 준비를 한다.
오늘 하루, 아침부터 밤까지 시간을 보내며
광화문에서 느낀 감정은
‘감탄’이라기보다는 ‘안도’에 가까웠다.
이 도시가 여전히 받아주고 있다는 안도감,
그리고 다시 이 도시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있다는 확인이었다.
귀국 이후 수많은 날을 보냈지만,
이렇게 온전히 서울의 중심에서
하루를 보냈다고 느낀 날은 흔치 않았다.
광화문은 여전히 크고 웅장하지만,
동시에 개인의 서정을 허락하는 드문 공간이다.
혼자 걸어도 외롭지 않고,
함께 걸어도 소란스럽지 않은,
포용력이 큰 공간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특별한 계획이 없어도,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도
그냥 걷고 싶어지는 곳이다.
낮의 흔적과 밤의 준비가 겹치는 시간대에
도시는 하루를 정리하고, 직장인들은
각자의 집으로 흩어진다.
그러나 요즘처럼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앞둔 시기에는,
축제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광장은
오히려 낮보다 더 분주해진다.
광화문광장은 도시의 중심이면서도
삶의 주변을 허락하는 곳이다.
역사의 무게를 품고 있으면서도
일상의 가벼움을 잃지 않는 곳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루를 성실히 살아낸 사람에게
조용히 ‘수고했다’고 말해주는 공간이다.
오늘은 아침부터 밤까지,
근무 시간을 제외하면 마치 서울을 찾은
관광객처럼 하루를 보냈다.
늦은 밤 집에 돌아와 보니,
무려 3만 2천 보를 걸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다.
숫자보다 오래 남는 것은,
그 하루가 광화문이라는 공간과 함께
또렷하게 기억된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