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복궁 영제교
25년 12월 24일, 수요일
# 경복궁 영제교
점심시간 산책으로, 경복궁 나들이만 올해로 14번째이다.
오늘은 경복궁 금천교인 영제교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영제교 위에 서면 근정전이 정면으로 열린다.
다리를 건너는 순간, 시야가 트이고 공간의 성격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 짧은 거리 안에 조선이 만들고자 했던 권위와 질서, 그리고 미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조선의 5대 궁궐에는 어김없이 금천교로 불리는 다리가 놓여 있다.
궁궐의 첫 문을 지나 다음 공간으로 들어가기 전, 반드시 한 번은 건너야 하는 다리이다.
금천교는 단순히 물길을 건너기 위한 구조물이 아니라 속세와 왕의 공간을 가르는 경계의 장치였다.
눈에 보이는 물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질서와 위계를 건너는 다리였다.
경복궁에서 흥례문과 근정문 사이에 동서로 흐르는 명당수 위에 놓인 영제교는 평소에는 물이 많지 않지만, 그 존재만으로도 이곳이 아무나 들어설 수 없는 공간임을 말해 준다.
왕과 신하, 정무와 일상, 속됨과 성스러움 사이에는 물이 흐르고, 그 위에는 다리가 놓였다.
그래서 금천교는 늘 중앙이 가장 높고, 난간에는 서수와 상서로운 문양이 새겨져 있다.
아무 생각 없이 건너가더라도 어느새 자세가 바르게 고쳐지고, 걸음도 자연스레 느려진다.
몸이 먼저 공간의 규범을 알아차리는 순간이다.
아침마다 을지로 4가의 배오개 다리부터 광화문 청계 광장까지 슬로 조깅을 하면서 청계천의 다리들을 차례차례 지난다.
배오개 다리에서 시작해 광통교, 장통교, 수표교를 지나 광화문 청계 광장까지, 아침의 청계천은 여전히 사람들이 바쁘게 스쳐 가는 길이지만, 그 위에 놓인 다리들은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수백 년의 시간을 견디고 있다.
궁궐의 금천교가 질서를 건너는 다리라면, 청계천의 다리들은 삶을 건너는 다리다. 장사꾼이 지나고, 백성이 지나고, 관리와 사대부,그리고 오늘의 우리들이 지나간다.
청계천 복원 공사를 하면서 기존에 있던 수표교의 석제 다리는 원형이 장춘단 공원에 임시로 옮겨져 있어서 유일하게 복원을 위해 임시로 목제 다리가 설치되어 있다.
해외여행 중에도 수많은 다리들을 만났다.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 뉴욕의 브루클린 브리지, 시드니의 하버 브리지와 같은 대형 다리들은 대개 다리 밑을 지나는 유람선에서 올려다보거나, 다리 입구에서 인증사진 한 장 남기는 것이 전부이다.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이스탄불의 보스포러스 교 역시 버스를 타고 왕복으로 지나쳤을 뿐, 늘 멀리서 바라보기만 한 거대한 구조물이었다. 부다페스트의 체체니 다리, 쾰른 대성당 앞의 호엔촐레른 철교, 런던의 타워브리지 같은 다리들은 그나마 도보로 건널 수 있어 조금은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난간에 다닥다닥 매달린 연인들의 자물쇠를 보며 수많은 사연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정감이 가고, 그냥 건너기보다는 한동안 머물고 싶은 다리는 작고 오래된 석조 다리들이다. 사람과 사람, 땅과 땅을 잇는 본래의 기능을 넘어 공연장이 되고, 테라스가 되고, 연인들의 약속의 장소가 되고, 놀이터와 갤러리가 된 다리들. 건너고 싶은 다리가 아니라 머물고 싶은 다리들이다.
르네상스의 출발지 피렌체의 베키오 다리는 단테와 베아트리체가처음 만났던 낭만의 다리다.
베네치아의 리알토 다리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의 주요 무대가 되었다. 파리의 퐁네프 다리는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 이후 ‘연인들의 다리’라는 별칭을 얻었다.
프라하의 카를교는 30개의 성인상보다도 그 자체가 하나의 공연장이자 화가들의 갤러리이다. 낯선 이들과 눈웃음을 나누며 금세 연인이 될 것 같은, 떠나고 싶지 않은 다리이다.
독일 코롬라우의 라코츠 다리는 반원형 아치교의 특성을 살려 다리 위의 모습과물에 비친 그림자가 합쳐져 완전한 원을 만든다.
오로지 다리 하나를 보기 위해 무작정 번개 여행을 떠난 적도 있다.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를 기점으로 육로 600km를 달려 모스타르에 도착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모스타르에 있는 스타리 모스트라는 다리이다.
‘스타리 모스트’는 ‘오래된 다리’라는 뜻을 갖는데 16세기 오스만 투르크가 네레트바 강을 건너기 위해 1557년 착공해 1566년 완공했다.
폭 4m, 길이 30m, 강 위 24m 높이에 놓인 단일 아치 석조교로 당시 세계에서 가장 긴 단일 아치 다리였다. 유럽의 수많은 전쟁을 견뎌냈지만 1993년 유고슬라비아 내전 중 크로아티아계 민병대의 포격으로 무너졌다.
유네스코의 지원으로 복구되어 2004년 재건, 2005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인터넷에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를 검색하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름이다.
매년 7월 마지막 일요일, 이 다리에서는 다이빙 대회가 열린다. 차갑고 유속 빠른 네레트바 강으로 몸을 던질 수 있는 이는 숙련된 다이버뿐이다. 다리를 건너면 무슬림 거주 지역이 이어지고, 터키의 흔적이 골목과 바닥 돌, 기념품 가게에 남아 있다.
해외의 다리들이 기억과 낭만의 무대였다면, 조선의 금천교는 절제와 침묵의 공간이다. 머물라고 만든 다리는 아니지만, 서서히 걷게 만들고, 고개를 들게 하고, 말을 줄이게 만든다. 다리는 이곳에서도 건너는 구조물이 아니라 마음을 가다듬는 장치이다.
수많은 나라의 다리를 보았지만 결국 가장 오래 붙잡아 두는 것은 매일 아침 스쳐 지나가는 이 작은 다리들이다. 청계천의 다리, 그리고 경복궁의 영제교를 보면서 다리는 멀리 있을 때보다 일상 속에 있을 때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게 한다.
오늘도 경복궁의 영제교를 건너며, 시간과 기억의 한복판을 조용히 지나간다. 다리는 건너는 구조물이 아니라, 시간과 기억이 머무는 장소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