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의 책“ 다이앤 앤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개인의 독자성을 지켜야 한다.” 인간은 고독하고 내밀한 공간 안에서 양분을 얻고 자극을 받기 때문이라는 말.
내밀한 공간은 단순히 혼자 있는 공간이 분명 아닐 것이다. 그 공간 안에서 호흡이 느려지고 몸이 이완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곳. 스스로 우울이라는 감정 에 지배당하지 않고, 자신을 통찰할 수 있는 곳. 그런 곳이 과연 있을지 궁금하다.
홀로서기 위해서 했던 노력들이 내겐 있다. 함께 하는 취미생활은 모두 그만두고 혼자서만 가능한 책 읽기를 시작한 일. 친구들이 해외여행을 함께 다녀오자고 해도, 안줏거리가 될 추억들을 뒤로한 채 혼자서 다른 나라 비행기 티켓을 알아보는 일. 옷 사는 걸 좋아했던 내가, 사람들과 단절되기 위해서 옷을 모두 버리거나 나누고, 집에다가 화분을 들여다 놓기 시작한일. 전부 홀로서기 위해서 했던 노력들이었다.
혼자가 되면서 우울한 상태로 인해 나의 세계가 확장되고 넓어지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내게 좋은 것들은 여전히 없다고 느껴진다.
자기 객관화에서 자기혐오로 넘어가고, 모든 상황에 온 갖 물음표들을 머릿속에 채워 넣어 어지럽게 만들다가 지쳐버리는 것도. 과연 내게 좋은 것일까. 나의 세계가 확장된다는 것은 과연 내가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사람들과 단절되며 약의 용량만 늘었을 뿐 사회에서 도태되기 시작했다. 나를 갉아먹는 생각들에 단순해지고 싶어서, 매일 밤 술을 마셔야만 잘 수 있다. 이것이 과정이 아닌 혼자가 된 결과일까 봐 혼자인 순간에 두려움을 느꼈다.
혼자서는 도저히 버틸 수 없었다. 온갖 우울한 얘기들로 남을 끌어내리면서 나를 알아봐 주기를 바랐다. 부모와 친구들에게 내 감정에 대해 배설할 때 나를 이해하려는 행동보다 불쌍하고 가련하게 여기기 마련. “힘들 때 언제든 얘기해.” 라는 말, 그들은 그 말에 책임질 수 없다.
결국, 개인의 죽음을 함께 할 수 없는 것처럼 외로움과 우울한 상태에 대해서 함께 나누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병률 시인이 말했다. “나를 탐구하고 발굴하기 위해서는 혼자여야만 가능하다는 말.” 낙관적 외로움의 으뜸인 그를 좋아해서 그의 말 또한 곁에 두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혼자가 된 지금의 나는 얼마나 자신을 돌아보고 돌봤을까.
혼자로서 얻을 수 있는 양분이 있다는 말에 대해서 전부 부정하지는 않는다. 모든 것들은 양면성을 띄고 있으니까. 부정적인 생각들에 갇혀있는 내가 생겼다면 내게 없던 좋은 모습들도 생겨버렸으니. 나를 탐구하고 발굴해 나가는 과정임에는 분명한 듯 보인다. 혼자가 되고나서 좋은 것들에 대해 떠올려본다.
남들이 좋아하면 나도 좋아했고, 남들이 이상하다 그러면 나도 이상하게 생각했던 시기가 있었다. 신을 믿지도 않고 우리에게는 서로밖에 없으니 잘 지내기 위해서상대방에 주파수에 맞춰지는 것. 그것이 내가 살아왔던 방식이고 예쁨 받을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 시절에 나의 머릿속은 물음표가 아니라 전부 마침표였으니까. 물음표가 떠오르고 난 뒤, 나는 선명하고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좋고 싫음을 느끼는 것들에 있어서왜 좋거나 싫은지 에 대해서 구체적인 이유를 찾다 보니 정말 좋다고 혹은 싫다고 느끼는 것인지 아니면 타인에게 맞추기 위해 생각 없이 내뱉는 좋고, 싫음인지 구분 짓게 되었다.
우울한 상태에 대해서도 물음표를 붙여봤다.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라는 말 때문에 이전의 ‘나’와 비교하면서 변화를 거부하고 사라진 모습들에 대해 그리워하고 우울해했다.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는 말을 믿어서는 안 된다. 사람이 변하는 것은 자연재해와도 같았다. 어떤 상황에 따라서 한순간에 변하기도 했다. 없던 내가 한꺼번에 생겨버리고 이전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었다. 언제든 어떻게 변화할지 모르는 내 모습에 대비할 수 없었다.
우울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이 아직 내겐 없다.다만 오랜 기간 숙성된 된장이 최고의 맛을 낸다고 했던 것처럼 혼자로서 숙성된 시간들이 불어넣어 주는 게있음을 믿는 것이 방법이라면 방법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