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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리카 Jul 26. 2023

조금 가벼워진 발걸음

미디어 중독에서 벗어난 건가?

7월 19일 (수)


오늘 아침은 어제 아침보다 수월하게 일어났다. 아무래도 하루 사이 체력이 조금 키워진 듯하다. 학교 가는 걸음이 조금 더 가벼워진 것 같다. 첫날의 긴장된 얼굴과는 사뭇 다르게 웃으며 농담도 하며 학교로 향하고 있었다. 나 역시도 아이들의 빠른 적응에 한시름 놓고 있었다.


아이들을 보내고, 나도 조금 더 마음의 여유가 생기니 동네를 조금 더 돌아볼까 싶었다. 매번 어디 갈 때마다 목적지를 정하고, 구글 맵에 의지하며 따라갔는데, 오늘만은 구글맵에 의지하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걸어보고 싶었다.


학교 뒷문 방향으로 나와 길을 한참을 걸어갔다.

‘Hatherley Rd.’

익숙한 도로 이름이 눈에 띄었다. 예전에 내가 머물렀던 기숙사 주소가 바로 Hatherley Rd. 였다. 아마도,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내가 생활하며 십 대의 일부를 보냈던 기숙사가 보일 것이다!

저 멀리 낯익은 벽돌 모양의 입구 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음이 갑자기 두근거렸다. 맞다. 바로 그 문일 것이다. 걸음을 빠르게 재촉하여 벽돌 모양의 입구에 다다랐다. 문 앞 창살 위에 크게 ‘Fawley House’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맞는구나! 바로 그 기숙사!

어쩐지 너무 다가가면 수상하게 여길 것 같아 멀리서 살짝 사진을 찍었다. 안쪽을 빼꼼히 쳐다보니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아마도 사감선생님이 상주하고 있는 것인지, 커다랑 차량 두대가 주차된 것이 보였다.

기숙사에는 다양한 형태의 방들이 있었다. 처음에 저학년일 때에는 6인실을 썼다가, 한국오기 직전에는 고학년 프리미엄으로 독방을 쓰기도 했다. 그 당시 유학생들의 바이블 같았던 7막 7장에 감명을 받아, 나도 따라 취침시간을 어기고 화장실에서 밤새워 공부를 하다 사감선생님에게 들켜 혼났던 일도 생각이 났다. 2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는데, 겉모습을 그대로 하고 있는 기숙사 건물을 보고 있노라면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온 것 같다. 저 공간에서 기도하며 외로움과 싸우고 있었던 사춘기 여자아이가 보이는 것 같았다. 그때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 어른이 된 나는 여전히 거기에 남아 있는 것 같다.


너무 깊이 감상에 젖는 것 같아, 다시 바삐 발걸음을 돌렸다. 저 멀리 보이는 언덕이 손에 닿을 것만 같아, 그쪽으로 무작정 가 보기로 했다.

한참을 걸으니, 공원 입구가 나왔다. 아직 저 멀리 언덕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공원에라도 우선 들어가 보기로 했다. 깔끔하게 잘 정리된 공원이었다. 많은 동네 사람들이 개를 산책시키고 있었다. 넓게 펼쳐진 잔디밭에 앉아 있노라면 지금까지의 모든 긴장감이 사르르 녹는 것 같았다.


공원 안에 있는 예쁜 간이 카페가 나를 유혹했다. ‘카페인 없이 이 멋진 풍경을 보고만 있을 거야?’라는 손짓에 이끌리듯 카페 아가씨에게 라테를 주문했다. 영국 카페에서 그다지 맛있는 커피를 마셔보지 못해서 별로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풍경이 너무 멋져 카페인은 양념 같이만 더해져도 좋았다.



공원에서 한숨 돌리고, 집으로 다시 향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킨 후 부엌 정리했다. 정리된 부엌에 앉아 밀크티를 한 잔 마셨다. 참 신기하다. 여기서는 아무 티백이나 물에 우려서 우유를 넣으면 특유의 구수한 맛이 난다. 같은 티백을 아무리 한국에서 우려도, 아무리 좋은 티를 마셔도 이 맛이 나지 않는 건, 아마도 지금 내가 소비하고 있는 이 공간이 절대적으로 한국에서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아이들을 데리러 간다. 3일째 되니 나도 이 픽업길이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차는 운전하지 않을 생각으로 최대한 학교에서 가까운 곳으로 숙소를 잡았는데, 은근 영국의 지방은 보도가 잘 되어있지 않다. 폭도 넓고, 조용하고, 치안도 좋은데 이상하리만치 신호등이 없다. 대충 눈치 보고 다들 건너는 분위기인데, 은근 차도도 넓어서 신호를 찾아다니는 것이 일이다.


아이들을 맞이하니, 두 아이들 모두 지쳐 보인다. 하루종일 운동만 하는 프로그램이라서 그런지 아이들의 체력이 바닥이 나는 것 같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뛰어서 놀 수 있는 환경에 있는 아이들과, 한국에서 학원 뺑뺑이를 돌던 아이들이 비교가 되면서 동정심이 들기도 했다. 아무리 아이들을 육체적으로 뛰어놀게 하고 싶어도, 놀이터에 친구가 없고, 그나마 예체능 학원이라도 가야 수영이든, 축구든 할 수 있는 현실……또 아웃풋을 원하는 학부모가 있기에 마냥 노는 것이 아닌 그곳 조차 배워야 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안타깝기는 했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에 있을 때, 아이들은 노는 법 조차 몰라 오로지 유튜브나 로블록스 같은 온라인 게임에서만 즐거움을 찾고는 했다.


아이들이 3일째 몸으로만 신나게 놀고 오니, 놀라운 변화가 생겼다. 큰애가 오자마자 책을 집어 들었다. 둘째 아이는 오자마자 카드게임을 들고 친구가 보여줬던 카드마술을 자기도 해 보겠다며 나를 불렀다. 예전에는 학교에서 돌아와서 쉬고 싶다고 유튜브나, 게임만 찾던 아이들이, 신나게 놀고 나니 온라인 매체에 의존하지 않고 노는 법을 익힌 듯하다. 이 것만으로도 이 돈을 쓰고 지구 반대편까지 온 보람이 된다. 물론 한국에 돌아가면 말짱 도루묵이 될 것 같기는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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