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연대보증

by 무지개

(형제)

나는 3남 1녀 중 셋째이다.

친정에서는 외동딸이다.

오빠 둘은 넉넉하지 않은 가정환경상 부모 지원 없이 형제 모두 각자 독립하여 일찍 자기 사업을 하였다.

우리 형제는 자신의 자리에서 서로를 응원하며 그때까지 형제 관계는 나쁘지 않았었다.

결혼 전, 나도 빈손으로 시작하여 지방에서 교습소 운영을 했다.

결혼 후, 담보 대출을 일으켜 남편과 같이 학원 시작한 지 5년쯤 되었을 즈음, 학원을 확장하며 발생한 나의 대출이 모두 상환을 한 상태였다.


(법인등기)

결혼 당시 오빠 둘은 경기도에 시작한 의류 사업은 확장하며 운영하고 있었다.

내가 지방에서 신혼 생활하고 있을 때 큰오빠의 사업은 IMF를 겪었지만 번창하고 있었다.

2000년대는 IMF가 지나간 자리를 빨리 회복시키고자 정부에서는 경제 성장을 목표로 사업자 운영 대출을 실시하고 있었다.

그때 친정 큰 오빠는 중소기업 대출로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법인 등기를 희망했다.


학원만 운영한 우리는 세상 물정이 어두웠었다.

오빠는 전화로 매일 법인 등록을 위해 나에게도 인감도장을 부탁하였다.

오빠의 사업에 관심이 부족했지만 친정일에 도움을 주고자 경기도로 남편과 함께 신용보증재단에 갔다.

법인 서류를 하러 가보니 실질적 내용은 연대보증을 해야만 하는 구조였다.


(연대보증)

남편은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연대 보증이라는 서류를 보고 인감도장 날인을 내가 망설이자, 형제가 안 서주면 누가 서주냐 하며

남편은 자신이라도 보증한다고 처남을 믿었다.

“형님이 하는 일인데 별일 없을 터이니 보증에 인감도장을 찍어주자”

하여 결국은 인감 날인 했다.

그것은 내 인생 최대의 실수고 후회가 되고 말았다.


그 후 몇 년간 오빠의 사업은 잘됐다. 그리고 계속 잘 되고 있었다.

문제는 오빠의 태도였다.

사업은 번창했지만, 오빠는 부가세를 납부하지 않았다.

문제가 발생하자 오빠는 회사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사업자명의를 오빠의 처가로 돌렸다.

그 후로도 부가세와 대출은 갚지 않고 그동안 겪은 가난의 허기를 허세와 사치로 메꾸어 갔다.

어린 시절 내가 알고 있던 오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믿었다.

사업이 잘 되니 대출 상환을 계획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대출 상환이 도래하고 더 이상 연장이 되지 않았다.


(가압류)

아무것도 모른 체, 어느 날 갑자기 내 집. 학원이

가압류되어 있었다.

소유권이 나에게 있었던 우리의 일터와 통장이 한순간 가압류가 되었다.

하루아침에 생활비 내 카드도 모두 정지되었다.


그때까지도 오빠는 회사를 운영하며 보증으로 인한

경매가 어려운 내 집을 근저당하여 회사 부채를 막고 잠시 희생하여 달라고 하였다.

근저당은 내가 양보하지 않아 가압류 상태에서 학원은 한동안 운영이 되었다.

남편은 큰 오빠를 믿었다.

그리고 오빠가 해결하리라 1년을 믿고 기다리면서 가압류된 학원을 운영하며 오빠의 처분을 기다렸다.

남편은 그때부터 시아버님이 안 계신 텅 빈 낡은 시골집을 혼자 고치며 서운함을 삼켰다.

원망대신

남편은 학원일이 끝나면 날마다 시골집에서 몸으로 농사를 지으며 기다리고 또 기다리면서 마음을 달랬다.


(경매 그리고 신용불량자)

그러던 어느 날 집 대문에 빨간딱지가 붙었다.

오빠가 부가세를 해결하지 않아 학원이 있는 집은 1년이 지나 결국 경매로 날아갔다.

오빠는 내 이름으로 대출을 얼마 받았는지도 말하지 않아 결국 나는 신용불량자가 되었다.

나는 신용 불량자가 되고 어렵게 일군 우리의 미래가 경매와 함께 사라졌다.

그렇게 지옥 같은 시간이 시작되어 눈물로 보냈다.


남편은 그때 말했다.

"60에 잃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이냐?"라고 그러면서

희망을 말하며 내 꿈을 다시 세워 주었다.

학원이 잘되던 터라 1차 경매로 낙찰되어 가족이 갈 곳을 잃었다.

어떤 사람에게는 타인의 불행은 때론 자신에게는 기회가 된다는 것도 나는 배웠다.


경매에 참가한 사람은 우리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때로는 학원비를 받지 않고 믿었던 학부모가 낙찰해 이익을 남기고자 집값보다 높은 금액을 요구했다.

남편은, 자신의 이름으로 빛을 다시 내어 경매된 학원을 학부모에게서 다시 사주었다.

그렇지만, 나와 남편은 친절을 베푼 사람에 대한 실망과 의욕을 잃어 학원은 점점 쇠퇴하여 갔다.

그 일로 일어난 주변 사람에 대한 여러 아픔을 겪은 남편은 학원 일을 그만두고 자기 일을 하고 싶어 했다.


(타향살이)

나는 남편을 말릴 자격이 없었다.

내 친정 일로 나를 미워하지 않기 위해 떠난걸 나는 느꼈다.

고향을 떠나 다시 자신이 하던 건설일을 시작하며 대출을 갚기 위해 전국으로 이동 생활이 시작되었다.

오빠에 대한 나의 원망은 시작됐다.

남편은 친정 일에 마음껏 화를 내지 못했다.

그저 울고 있는 나를 지켜보다가 그렇게 남편은 고향을 떠났다.

억지로 떠밀려 간 남편의 고생은 시작되어

그리고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세월 남편의 마음의 병은 깊어져 가고 있었다.

혼자서 아무도 모른 체...


(원망)

술이 유일한 친구인

남편의 희생은 우리 가족의

일상을 원상태로 돌려놓았다.

그 일로 나는 보증과 돈, 사람에 대한 기준도 바뀌었다.

지금은 돈에 대한 것은 어떤 이유든 그 누구와도 거래하지 않는다.

그것은 남편의 유언이기도 하였다.

지나고 보니 내게 소중한 것은 물질도 아니었다.

사람이었다.

오빠가 남편이 살아 있을 때 미안했다고 말했다면

나는 용서가 좀 더 빨랐을 것이다.

그러나 오빠는 그 말을 끝까지 하지 않았다.

‘사과하면 돈이 생기냐?’라고 오빠는 그랬다.


(용서)

세월이 지나 남편은 그 자리에 없다.

그리고 오빠도 늙어간다.

지금 오빠는 경제적으로 빈곤하며 몸이 매우 아프다.

연로하신 부모님은 장남인 오빠를 매우 안타까워하며 돌보고 있다.

부모님의 안타까운 마음은 내 어깨에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러하나 오빠를 대하는 나의 태도는 예전과 같아질 수가 없다.

이제 용서라는 말은 결국은 내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다.

아니, 용서는 어쩌면

나는 누구든 용서할 자격이 없다.

내가 남편에게 구해야 하는 것이다.

가족이 함께하지 못한 세월,

떠돌게 한 세월, 여유를 갖지 못한 세월

남편이 혼자 감당하며 고생한 세월이다.

그리고 남편이 몸부림쳤던 아픔의 세월이다.

지금, 살아 있는 나는 남편의 입장이 되어

그 시절 내 아픔만 보며 투정만 했던 세월

내 요구만 내세운 이기적인 나를 돌아보며 그 어리석음을 후회하고 있다.


그 시절

처갓집 일로 표현 못 하고 서운함을 달래며 시골집을 수리하던 남편의 손길이 이제야 느껴진다.

그때 게워내지 못한 남편의 말을 내가 대신하며 게워내고 있다.

나는 체한 듯 걸려있는 돌덩이를 살아서 게워 내고 있는 것이다.

오물처럼 흠이 되는 친정 이야기로 게워내며

사죄하는 마음으로 나의 이기적인 마음을 용서해 달라고 빌어야 된다.

설날이 길일이 되어버린 오늘을 살며

남편의 아픔을 달래 주었던 시골집에 혼자 남아서 하늘에 있는 남편에게

용서해 달라고 내가 사는 동안 구해야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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