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봄날

by 무지개

“빵빵~빵 빵~빵!” “와! 차왔다.” 피아노 학원 앞 공터에서 놀던 아이들이 일제히 우르르 차를 향해 뛰었다. “얘들아, 위험해!” 나의 큰 소리는 묻힌 채 아이들은 봉고차의 앞자리를 타기 위해 내달렸다. 아동들이 입은 빨간 티셔츠의 등을 보이며 언제나 경적에 돌아보지 않고 뛰곤 하였다.

2002년 월드컵의 열기는 온 국민을 뜨겁게 데워 놓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4강 진출에 우승을 기대하는 축구 축제는 그 당시 모두의 즐거움이었다. 축구에 관심이 없던 나도 빨간색의 티를 슬며시 입고 30대를 보내고 있었다.

1997년 겨울 국가부도의 ‘아이엠에프’가 지나간 자리는 아물지 않았었다. 모두의 아픔을 안고 봄과 여름의 경계에서 맞이한 월드컵은 어른과 아이들의 희망이 되어 주었다. 아이들과 축구를 좋아한 남편도 월드컵을 열심히 응원했다.

남편은 결혼 후 출장이 많은 사업을 접고 나에게 “원장님” 하며 학원 차 운전을 스스로 했다. 학원생 등원을 맡은 남편의 자동차 경적은 “빵빵~빵 빵~빵!” 이였다. 남편은 땀 내음이 베인 빨간 티를 분홍빛으로 바랠 만큼 쉼 없이 아이들을 이동하였다. 아이들뿐 아니라 학부모들도 걷고 있는 거리에서 만나면 시장에 태워다 주거나 “빵” 하며 인사를 거르지 않았다. 남편을 신임한 맞벌이 부부는 남편에게 자녀의 입학을 맡기기도 했다. 말이 없으며 살갑지 않은 나는 가르치는 일 외에는 학부모와의 소통이 어려웠다. 그 일을 남편이 대신 했다.

나와 정반대의 남편은 아이들과 학부모들의 스타였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 주고 추진력도 강한 남편의 성격은 학원 운영을 순조롭게 하여 주었다. 뉴스를 통해 많은 사람들의 잃은 일자리와 어려움을 들었을 뿐, 나는 ‘아이엠에프’를 체감하지 못했다.

그 봄날의 젊은 나는 늘 피곤하고 잠이 부족하였다. 홀 시아버님을 모시며. 이른 아침 식사와 시댁 가족의 잦은 방문으로 외출 또한 힘들었었다. 학령기에 접어든 딸아이의 교육에 대한 욕심과 매일 늘어나는 200명이 넘는 학원생 수로 나의 입술은 매일 부르트곤 하였다. 하루 종일 들리는 아이들의 서툰 피아노 소리와 떠드는 소리는 나를 빨리 지치게 하기도 하였다.

피아노 지도하며 원생에게 한 번씩 연주 시범으로 들려준 반주는 밤마다 손가락과 팔목의 통증이 되기도 하였다. 일과를 마치고 퇴근 후, 집에서 음식을 할 때는 환풍기 소리도 듣기 싫어하며 환풍기를 켜지 않을 때도 많았다. 화장실의 물소리 전자레인지 소리도 나에겐 싫어하는 소리가 되게 하였다. 결혼 전 대중가요를 좋아했던 나는 어느 날부터인지 음악도 소음으로 인지하여 음악을 켜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주변이 무음일 때 평온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세월은 흐르고 있었다.

어느 한날 나는 넓은 들판으로 소풍을 왔다. 들판 한 가운데 앉아 또다시 봄바람이 불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영화의 한 장면처럼 푸른 잔디에 누워 눈을 감아 보았다. 마음에 지나고 있는 바람 소리에 눈을 뜨니 내 인생의 무음인 평온이 내 곁에 머물고 있다.

지금 나는 생각한다. 그날이 그리운‘내 인생의 봄날’ 이였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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