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깨탕
봄이 되니, 들판은 온통 녹색으로 변하고 밥상에 올라올듯한 식재료는
걷는 걸음마다 가지런한 모습으로 단장하고 작은 텃밭에 옹기종기 모여있다.
발걸음이 멈추는 곳에 쪼그리고 앉아 들고 있는 바구니에 한 움큼 뜯은 채소들은 쌈이 되고 나물이 되고
겉절이가 되어 나의 밥상을 채운다.
밤 동안 적막했던 집 안에는 씻고 다듬고 써는 소리로 가득 채워 놓는다.
아침을 깨우던 물소리에 조용히 다가와 뒤에서 안아주던 남편의 따뜻한 모습이 떠올라 채소를 툭툭 털어
채반에 올린 후 음악을 틀어 놓고 집 앞마당으로 향해본다.
마당 앞 언덕 위에 비가 내려 올라온 머위 순을 가위로 자르고 일어서니 오랜 세월 자리 잡고 버텨온 오가피나무가 가로막고 서있다. 무너질 듯 내려앉은 언덕을 붙잡고 뻗어 나오는 가지마다 오므리고 있는 아기손처럼 어린 오가피 새순이 나를 유혹한다. 사계절 중 봄에만 얻을 수 있는 씁쓸하고 독특한 향을 지니고 있는 여린 새순을 톡톡 따서 이끌리는 향에 코에 대어보니 자연이 주는 행복함이 다가와 머리가 맑아진다.
한 소쿠리 담긴 머위와 오가피 순을 담아 미끄러질 듯 언덕 아래로 내려오니
나 혼자만의 밥상을 위한 수고로움에 알 수 없는 웃음도 나온다.
결혼을 한 후 밥상은 늘 남편을 향해 있었다.
남편은 밥상을 마주하기 전 텔레비전을 보다가도
하나의 의식처럼 주방에서 나오는 밥상을 마중 나와 받아 들고 나를 보며 앉았었다.
밥상 앞에 마주 앉아 하루의 일과를 이야기하며 남편의 젓가락이 향하는 반찬을 유심히 보았다가
앞으로 밀어주면 웃어 주던 반찬은 들깨탕이었다.
커다란 대야에 소쿠리채 털어 몇 번을 헹구어
연한 머위순은 삶아 된장에 버무리고 줄기는 껍질을 벗겨 들깨탕을 끓여
시어머님이 남기고 간 유리그릇에 담아 나의 밥상을 차려 본다.
달래는 뿌리째 총총 썰어 간장, 참기름, 고춧가루로 양념을 하여 마른김에 싸 먹고
오가피순은 삶아서 소금, 깨소금, 참기름으로 양념을 하니 이보다 더 맛난 것은 없다.
부추와 상추, 양파는 도토리묵과 양념을 넣어 버무리니 바라만 봐도 입안에 침이 고인다.
지난날 밥상 앞에 마주 앉아 바라본 남편대신
마당이 보인 창 넓은 식탁에 봄의 채소들을 놓고 앉아서 들깨탕 한 숟갈 떠먹어본다.
결혼 후 남편의 주문에 만들었던 들깨탕의 맛을 나는 아직도 무슨 맛인지 모른다.
내가 준 들깨탕을 깨끗하게 비우고 빈접시를 내밀며 " 한 그릇 더" 하고 웃던
남편의 얼굴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 내게 느껴진 들깨탕 맛이다.
음악보다 크게 들리는 새소리에 창밖을 바라보니 아직은 메마른 감나무 가지 위에서
이름 모를 새 한 마리 나를 향해 지저귀고 있다.
물 한 모금 마시고 오가피 나물에 젓가락을 올리려 하니 유리창을 뚫고 들이댄 햇빛이 내 밥상에 내려앉는다.
입안 가득 채소를 넣어 음미하며 내가 무슨 음식을 좋아하나 가만히 생각하여 보며 삼켜본다.
밥 한 숟가락 입에 넣고 앞마당의 자연에 다시 눈을 맞추어 바라본다.
돌 틈 사이로 작은 입을 벌려 무언의 말을 전하는 노란 수선화와
분홍빛 이불을 펼쳐놓은 꽃잔디에 귀 기울여 들어보니 봄임을 말하고 있다.
그 옆 좁은 텃밭에서 서리를 털고 일어난 잎채소들은 낮은 키로
장독대 항아리 사이에서 바람의 방향에 밀리며 얼굴을 살짝살짝 보여준다.
겨울의 찬바람을 보내 듯 천천히 손을 흔드는 잔바람이 되어 풍성한 식재료들을 몰고 다시 내 곁에 찾아왔다. 언제나 같은 모습 변함없이
늘 나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음을 내가 몰라 주었다.
계단이 되어준 돌 사이에 꽃잔디는 분홍빛 폭포가 되어 흐르고
차가운 돌을 따스히 덮으며 이불이 되어준 백리향은 내 곁에 변함없이 해마다 찾아왔음도 내가 몰라 주었다.
장독대 옆의 비닐 멀칭은 햇빛이 반사해 은빛 파도가 되어 바다의 파도처럼 출렁이며
잔잔히 들려오는 음악에 박자를 맞추어 주니 나의 밥상은 풍성하게 된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혼자 먹는 밥이 외로울 것이라고 그러나 여유로움이 있습니다)
-혼자 있는 것은 외로움이요. 나를 마주 보게 하는 것은 고독이다. -
어느 드라마 대사에서 듣던 말이 떠오릅니다.
그러면 괴로움은 무엇일까요?
"작가님들 ~식사 거르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