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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온 Aug 21. 2024

9월은 어쩌면 추울지도 모른다



출국 예정 디데이를 보기 좋게  기록하고 좋아하는 스티커로 다이어리의 빈 여백을 채운다.

무력해 보이는 인간도 자신이 원하는 목표의 과녁을 맞히기 위해 화살을 겨눈다면 각자의 심연밑에 숨겨진 초인적인 고도의 집중력과 실행력이 나온다는 것을 온몸으로 체험한 1년의 시간들이었다.

이따금 쏟아지는 잠과의 사투에서 패배하는 일도 빈번했다. 고3 때도 흐르지 않았던 코피는 한심했던 나를 벗어나 새로워진 내가 수여받는 자랑스러운 훈장과도 같았다.



공항 내부의 위치한 곳의 아르바이트를 통해 자금을 마련했다. 너무나 다정했던 사장님과 함께 공항 특성상 이른 시간대의 오픈 때문에 새벽 다섯 시 기상은 나에게 디폴트 값이 되었다. 일과 학원을 병행하며 반복되는 하루의 사이클을 통해 일상에 건강한 중력을 쌓으며 어린 과거의 나는"이렇게 노력하는데, 이렇게 선택한 삶에 책임감을 느끼고 사는 내가 잘 살 수 없겠어? " 들어줄 사람 없는 거만한 질문을 나에게 내뱉는다. 안타깝게도 그 선택의 방향이 출입제한 구역이었을 줄이야. 조금만 주위를 둘러보았다면 찾을 수 있는 안전구역을 보지 못한 채, 무식하게 앞만 보고 전진한 결과의 책임은 누구 것일까. 지금도 그렇고 예전도 그렇고 어리석은 나를 죽이는 범인은 오롯이 나였다. 공범은 아무도 없었다.




출국 당일은 고난의 계단이었다.

출국 하루 전 몇 주 전 보낸 EMS소포가

한국으로 반송되었다는 연락.

출국 당일 발생한 휴대폰 개통 문제.

확인한 줄 알았던 수화물 문제.

남은 시간은 앞으로 한 시간.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사람에게는 저마다 모르는 초인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드래곤볼에 나오는 초사이언이 된 나는 친구들이 몰래 준비한 깜짝 서프라이즈도 적절한 리액션도 하지 못한 채 짐을 던져놓고 우체국으로 향했다. 택시를 타고 돌아오는 동안 휴대폰 개통취소를 완료하고 친구에게 마지막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허겁지겁 비행기에 올랐다. 친구의 말로는 흡사 배지터가 날아다니는 것 같다고 했다.



수화물 체크에서 10킬로가 더 많아 10만 원을 지불했고, 액체반입 금지를 깜빡한 나는 내 손으로 선물 받은 값비싼 고가의 화장품들을 쓰레기 통으로 버렸다는...... 뭐 이런 황당무계한 일들이 단 몇 시간 만에 벌어지며 나는 슬퍼할 틈도, 창 밖의 구름을 보며 한숨을 내뱉을 힘도 없었다.

또 다른 사건이 나리타 공항에서 나를 맞이하고 있다는 걸 상상도 못 한 채 이 순간이 그저 오늘 일기에 적힐 텍스트라며 불안을 억누르며 오지 않는 잠을 꾸역꾸역 먹고 있었다.



도착한 공항은 어수선한 분위기를 풍긴다. 태풍으로 인한 전기사고 때문에 도쿄 시내까지 갈 수 없다는 안내음성이 천장에서 울려 퍼졌다. 마치 나의 방문을 거부한다는 말처럼 들리는 건 그저 나의 착각이었기를.



 “에이, 그래도 두세 시간 뒤면 다시 고쳐서 나갈 수 있겠지, 요즘 시대에 무슨 표류도 아니고....”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착륙하는 비행기들과 함께 헤아릴 수도 없게 늘어나는 인파들,

항공사 직원에게 화를 내는 중국인들의 고함, 집에 가고 싶다고 엄마를 붙잡고 우는 아이,

화장실 앞에 굼벵이처럼 몸을 구부리고 자는 남자,

그 사이에서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한국어는 들리지 않는다. 나약한 배지터는 카카로트가 될 수 없었다.


하우스 측에서도 어쩔 수 없는 사고이기 때문에 자신들도 해줄 수 있는 것들이 없다며 내일 안전히 도착하길 바란다는 돋움체의 상투적인 메일을 받고 노트북을 닫았다. 더럽지도 그렇다고 깨끗하지도 않은 공항 게이트 구석에 쪼그린 나에게 한탄할 시간에 책이나 하나 더 읽자는 자기 계발적 사념이 다시금 나를 채찍질한다. 야마구치 슈의 글을 묵묵히 읽어 내리며 두려움을 억누른다. 슬그머니 오른쪽 허벅지 쪽으로 쿠키를 내미는 주름진 손이 보인다.

안경을 낀 날카로운 인상의 주름이 자글한 아주머니의 말투는 꽤나 다정했다.

우리는 쿠키와 함께 짧은 이야기를 나눴다.

 

"괜찮니?"

나에게는 꽤나 많은 의미가 담긴 이 말을 쉽게 한 귀로 흘려듣지 못한다.

" 아니요, 괜찮지 않아요." 내뱉을뻔한 문장을 다시 내뱉지 못하도록 황급히 거짓말을 뱉는다.

" 저는 괜찮아요 "

타인의 위로는 가장 치명적인 독이라며 나를 세뇌시키고 어색하고 얄팍한 눈웃음을 짓는다.

호호 손으로 입을 가리며 수줍게 웃는다.

밝고 착한 여자아이인 척 또다시 연기를 한다.



나리타 공항 표류체험을 끝내고 아침이 되어서야 쪼그려 쥐가 나는 다리를 겨우 일으킬 수 있었다.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무거운 쇠사슬에 묶인 발목을 움켜쥔 것 마냥 무겁기만 했다.



숨이 멎을 수 있을 정도의 습도.

같이 동행해 주겠다며 손목을 잡아끄는

가부키쵸 지하 1층에 있을 것 같은 호스티스.

구김조차 보이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의 사람들.

뜨거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마음만은 차갑게 식는다.



 현실주의자라며 스스로를 규정했지만,

그 현실은 내가 상상으로 만들어 놓은 가상현실임을 깨달은 것은 메구로로 향하는 지하철을 탄 뒤의

일이다. 무식하게 울리는 캐리어 바퀴 소리를 멈추고 바라본 하얀 벽돌의 건물은 아늑함보다는

내가 받아들여야 할 책임의 크기처럼 느껴졌다.

하이틴 드라마에 나올법한 룸메이트들을 만나고 프렌즈의 인물들처럼 여러 관계들을

구축하고 추억을 만들어가는 젊고 푸른 상상을 꿈꿨던 자칭 현실주의자는 실은 그저 낭만주의자였다.



모든 예의는 인사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입주를 끝낸 밤,

맞은편 사람에게 작은 간식과 함께 인사를 드리기 위해 노크를 한다.

예의로 시작해 예의로 끝나는 나라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편협한 사고가 만들어 놓은 착각이었다.

약간 경직된 몸짓과 함께 당황스럽다는 표정이 나의 모든 신경으로 전달된다.

늦은 밤에 노크한 것이 실례였을까? 아니면 노크 소리가 너무 경박했나? 혹시 노크소리를 3번 이상 냈던가? 애꿎은 손가락을 탓하며 잘 부탁드린다는 인사를 끝으로 황급히 방으로 돌아갔다.

예상한 반응과는 너무나 상반된 결과에 뭐라 말할 수 없는 민망한 정적이 방안을 감돌았다.

그렇게 더웠던 9월은 나에게 있어서는 겨울처럼 춥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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