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머니가 되다
나의 어머니는 시집 온 첫 해에 시어머니의 장례를 치른다. 시어머니는 아프셨다. 몸이 자주 아파 신주단지라는 걸 가정집에서 모시고 신을 모셨다. 그러던 어느날 삶이 많이 고단하였는지 그것들을 모조리 보자기에 싸서 강가에 던져 깨부숴 버리고 불을 지른다. 그 와중에 장남인 나의 아버지를 바로 세우고자 하셨을까. 옳은 여자를 만나야 한다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나의 어머니를 찾아 온 동네를 헤맨다. 당시 나의 아버지는 할머니의 눈밖에 난 여자와 동거중이었다.
그렇게 나의 친할머니는 외할머니 집에 3일이나 기거하게 된다. 외할머니의 집은 버스를 타고 한참을 들어가야 하는 작은 마을이었다. 70년대에는 부산의 외곽지인 곳에서 자녀를 장성하게 키우고 같이 살아가는 가정이 많았기에 한 마을에 들리면 이집저집 처녀 탐방이 가능했다. 동네 어귀에서 듣고 왔다며 딸을 주지 않으면 안돌아간단다. 그렇게 낯선 사람은 외할머니 곁에서 사흘씩이나 먹고 자며 기거한다. 할머니의 무모한 도전 끝에 결국 외할머니는 선자리를 약속하고 만다. 경기도 화성에서 일하던 나의 어머니는 일면식도 없는 무례한 할머니의 주거침입으로 나의 아버지와 선자리에서 마주하게 되었다.
할마시가 막무가내이니 말릴 수가 있나... 이런 사람 처음 보니라.
한마디 밖에 못하는 나의 외할머니도 세상을 참 순하게만 살았나보다.
너무 마르다. 옷도 참 어디서 저런 맞지도 않는 것을. 신발은 닦지도 않고...
나의 어머니는 선 자리에서 만난 남자가 내키지 않는다. 당시에는 스물일곱이면 혼기가 차고도 넘치는 나이기에 떠밀려 결혼식 날짜를 덥석 잡고 만다. 물론 서두름은 나의 친할머니 혼자의 몫이었다. 선을 보느라 하루, 결혼식 준비하느라 하루. 이렇게 이틀을 만나고 식을 치뤘다. 동거하던 여자와 관계는 정리한 후였을까? 나는 아직 어머니께 물어 보지 못했다. 유일하게 많은 이야기를 털어놓은 딸이지만 차마 말하지 않은 것까지 묻지는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그렇게 명이 급한 모양이었는지 이제 갓 시집온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뤘다. 농사가 많은 집에 고집 센 시아버지와 부도덕한 철부지 남편, 그리고 아직 덜 자란 막내 시누이와 함께 살아가기엔 세상을 알지 못했다. 그녀 또한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경기도의 공장에서 일을 하며 모은 돈을 집에 보태어 주어야 했다. 고생 꽤나 한 삶이었다고 스물일곱이 되도록 다져졌다 믿었다. 하지만 다른 차원의 세계가 그렇게 고단하리라 나의 어머니는 예상치 못했다.
아들을 낳아야 했기에 나의 어머니는 총 3번의 유산을 거치고 딸 셋에 이어 결국 결혼 8년만에 막내동생인 아들을 얻었다. 그해에도 나의 아버지는 집에 일하러 온 젊은 여자와 바람이 났다. 아예 작은 아래채에 방을 하나 내어주고 왔다갔다하며 지내는 뻔뻔함에 어린 나는 엄마라는 삶을 측은히 여기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엄마를 잃을까봐 두려워 해야 하는 나이에 엄마가 살아있음이 걱정되었다. 동그란 무덤을 보면 엄마가 누울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어린 나의 눈에도 단박에 보이는 엄마의 삶은 얼마나 고난했던걸까.
엄마, 왜 도망치지 않았어? 이혼하지 않고 왜 바보같이 살았어?
결혼할 때 쯤 내가 물었다. 그저 엄마는 하루씩만 버텼다. 하루가 너무 힘들어 기절하다시피 잠들고 일어나면 또 정신을 빼놓는 일들이 기다리고, 그렇게 하루를 또 하루를 버티기로 살아냈다. 버티기의 이유는 우리 넷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