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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일상 Aug 02. 2024

너를 만나고 헤어질 결심을 하기까지

사랑, 그거면 되는 줄 알았어.

너는 내게 그런 사람이었어. 부모로부터도 들어본 적 없던 나를 종일 예쁘다고 말해 주는 사람(개성있게 생겨 센캐 소리를 종종 듣던 나였으니), 하고 싶은 말을 몇시간째 떠들어대도 웃으며 내 말에 귀기울여 주던 너였어. 소주 3-4병을 한두 시간 만에 마셔도 취하지 않던 우리를 기억해? 그럴 때마다 나의 백마디에 넌 한마디하며 웃고 있었던 것 같아.


시작은 그랬어. 첫눈에 너에게 반한 내가 여러번 문을 두드렸어. 날 만나주지 않으려고 온갖 핑계를 대던 너에게 찾아가고 매일같이 전화를 해대고..  


-오늘은 뭐했어? 네가 말하기 싫으면 내 얘기를 할게. 난 말이야...

-응, 그래.

-내일 영화볼래? 아님 밥이라도 먹을까?

-아니, 내일 친구들하고 도서관 가려고.

-그래? 그럼 나 도서관에 잠깐 가도 돼? 아니아니, 귀찮게 하지 않을게. 그냥 전화만 받아줘. 내일 봐!


그렇게 친구들과 정한 약속장소는 너의 도서관 앞이었어. 혹시나 네가 만나줄까하는 기대감이 컸나봐. 친구들의 응원을 받으며 도서관까지 힘찬 걸음을 내딛었지만 너는 정말 1분도 내게 투자하기 싫었나봐. 이런..


이십대 초반, 나의 연애방법은 참 단순했거든. 만나자고 하면 좋아하는 것, 망설이면 싫어하는 것. 만남에 망설이는 남자들에게는 미련을 두지 않았어. 그런데 이상하게 너의 망설임에는 온갖 이유가 있을거라 생각했다. 하루종일 연락 한통 없던 너에게 무슨 이유가 있었을까. 미저리 짓.. 때려치우겠단 생각으로 피아노건반을 때려부수듯 치고 전화기 폴더를 탁 닫아버렸지.


그래, 관둬라. 복을 그냥 차네!


몇십 일간, 밤 11시만 되면 전화해서 쫑알대던 애가 전화가 없어 그랬을까. 너에게서 처음으로 문자가 왔어.


-내일 시간 돼? 영화 볼래?


그 문자 한통에 신이 있다고 믿었다. 우리가 서면에서 만났을 때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나를 기억하니? 영화 보기 전에 밥부터 먹자고 했을 때, 너무 부끄러워 소주부터 찾던 나를 알거야. 미쳤지. 곧 영화관에 갈 애가 삼겹살 쌈에 생마늘을 얹어 소주잔을 비우던 내가 인상적이었댔니? 나 참...


너는 나의 수수함과 숨김없음에 매력을 느꼈댔어. 알고보니 너는 연애 한번 안해본 초초초식남이었어. 어쩌면 그래서 우린 서로에게 더욱 빠르게 빠져들었는지 몰라. 주말이면 친구들과 밤을 샌다며 연락을 툭 끊어버린 날엔,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며 받은 일당으로 내 선물을 사오던 피곤에 찌든 너를 어떻게 잊겠니? 너는 내가 살아온 세계의 내가 아닌, 새로운 나를 만들어 주기 위해 태어나 나에게 온 사람같았어.


네가 옳아.

그럼.

네 생각대로 해.

기죽지마, 그게 너잖아.

나의 존재를 가치있고 소중하게 만들어 주는 말로 장착된 로봇같았어. 아직도 나는 어린 후배들을 보면 떠들어대.


사랑, 그게 다더라. 젊은 날 사랑하지 않으면 죽은 것과 같아.


스물다섯에 시작된 연애는 매일같이 만나며 스물일곱까지 함께였고, 나의 지방 발령 이후로 주말마다 만나며 5년째 열애중이던 스물아홉 때였어.


이번 주말에는 꼭 집으로 오라던 엄마는 몸 져 누워 있었어. 터미널까지 마중을 마다하지 않는 엄마이지 않은가. 아픈 엄마의 곁에 가 앉았는데, 엄마가 나의 손을 꼭 잡더니 가만히 내 눈을 응시해. 엄마는 내게 이런 부담을 안기는 눈길을 준 적이 없어 느낌이 사뭇 진지했지.


-너, 그 남자랑 헤어져라. 서른여섯 일곱이나 되어야 자리 잡는단다.


엄마는 내딸이 그간 고생하며 남자를 기다리는걸 보기가 싫댔어. 누가 그랬냐고? 권보살님이 그랬다너. 부모복도 관운도 없어 딸래미 맘고생 깨나 하겠다고..


-응, 엄마. 걱정마. 헤어질게. 엄마가 헤어지라고 하면 내가 헤어져야지.


엄마는 나를 키우면서 강요라는 걸 해본 적이 없었어. 나의 결정을 다 존중해 주었지. 그런 엄마가 내게 거의 처음으로 부탁한 거야.


그 길로 나는 너에게 전화를 하지도 받지도 않은 주말을 보냈어.

그리고 너에게 그렇게,

그대로,

권보살님의 말을 전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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