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세계는 너로부터 인정된 것 같아.
엄마가 딸에게 하는 진심어린 첫 부탁을 들어줄 참이었다. 권보살님이라는 존재감보다, 그녀가 점쳤다는 우리의 미래보다 엄마의 상심이 크게 와닿았다. 그간 고생하며 공들여 빚어온 나를 엄마 앞에 그대로 세워 두어야 할 것 같았다.
그를 볼 수 없고, 나는 혼자가 되어야 하고 사랑을 잃어야 했다. 그로 꽉찬 내 영혼은 이미 산산조각이 나 머리끝에서 흩어지고 있었다.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슬프다는 걸 그제서야 처음 느껴본 것 같다.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진다는 상투적인 표현에 가장 가까이 다가서 있었다. 그간 내가 느꼈던 슬픔은 아쉬움이고 외로움이고 속상함이며 그와 비슷한 것들이었을 뿐이리라. 슬픔은 이런거구나. 소리 내어 울고 싶지만 샤워기의 물소리를 뚫을까, 욕실바닥에 철퍼덕 퍼져 앉아 차오르는 눈물을 꾸역꾸역 삼켜내느라 목구멍을 연신 눌러내어야 했다.
가족들과 주말을 애써 괜찮은 척 보내고 돌아가 룸메이트를 보자 눈물이 터져 나왔다. 놀러 온 그녀의 남자친구도 그칠 줄 모르는 나의 눈물에 두 시간여 동안 침묵을 지켜주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너, 지금은 헤어질 수 없을 것 같은데.. 미신이 어떻게 네 마음보다 중요하냐? 어머니에게 조금만 더 지켜봐달라고 해봐. 혹시 너도 어머니의 말이 중요하게 와닿았다면 어쩔 수 없는거고.
어쩌면 룸메의 남자친구 말이 맞았는지 모른다. 내가 많이 불안했다. 사귀는 동안 그가 어서 잘되면 좋겠다고 막연히 바랬다. 그의 현실이 선명하지 않아 스스로도 확신이 없었다. 때마침 엄마의 역술가 타령은 나의 흔들림을 지필 불씨가 되었다. 어쩌면 내가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었던 것이 부딪힘으로 오게 된 것이리라.
그는 외동아들이다. 나와 막 연애를 시작하던 스물다섯 즈음, 그의 아버지는 노름으로 전재산을 날렸다. 그의 어머니는 부지런을 떨며 아끼고 아껴 아들을 키워 왔다. 모든 것은 단박에 끝이 났다. 아버지의 개인택시를 넘기고 아파트를 나와야 했고, 가장 저렴한 달셋방을 얻어야 했다. 알고보니 그 윗층에는 조현병을 앓는 남성이 살았는데 한 두날 칼을 들고 내려와 협박하는 바람에 지금도 그는 큰소리에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 어머니는 몸이 여기저기 고장나기 시작했고, 병치레때문에 일을 더이상 할 수 없었다. 국립대를 다니는 영리한 아들이 어머니의 유일한 자부심이었다. 가진 재산을 다 날리고도 빚을 져야 했던 그에게 학비를 대어 주던 고모부는 쓴소리도 함께 보태주었다.
-그래도 네가 장남인데 학교를 다닐 때냐. 일을 해 돈을 벌어야지.
감사함을 느껴야 함에도 말한마디 거든 것이 비수가 되어 평생 고모부를 불편해하게 되었다. 학자금 대출도 되지 않았고, 그는 노동력의 댓가가 높은 일자리만 골라 아르바이트를 했다. 학교의 휴학제도는 한계가 있어 결국은 마지막 선택은 중퇴였다. 입에 단내가 나도록 힘든 일을 하고 모은 돈으로 공무원 공부를 하겠다며 노량진에도 가봤지만 몇 달이면 돈은 금세 바닥이 났다. 조바심을 낼수록 되는 일은 없었다. 그의 조바심의 이유는 나였다. 오랜시간 교제한 여자가 삼십대가 된다는 것, 무게감을 알기에 어떻게든 자신이라도 당당하게 자리잡고자 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야간 편의점을 지키며 책쪼가릴 놓고 공부했지만 체계가 없던 그에게 공무원 자리조차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나는 원래 성격이 불안이나 스트레스를 묵혀두거나 속으로 삭히는 스타일이 되지 못했다. 부딪쳐 박살내던지 아니면 불안과 스트레스의 원천을 파고 들어가 실체를 꺼내 놓고 결단을 짓는데 능했다. 인간관계든 학업이든 단순하고 명료하게 보려고 했다. 진실이 있는 곳에 서고, 도움이 필요한 자의 편에 있다면 그 길이 맞다고 여겼다.
헤어지자. 못기다리겠어. 가난을 좋아할 수 없잖아. 너의 불확실한 미래도 마찬가지이고. 나를 속물이라 생각해도 좋아. 나를 속일 수는 없잖아.
살아온 바대로라면 상대방의 상처쯤 생각하지 않고, 나의 마음을 직선적이고 솔직하게 전달했을테다. 그리고 예쁜 추억으로 남기자며 미화했을 것이다. 나는 적어도 진심이었고 솔직했으니 나쁠 건 없다며 미련없이 돌아섰으리라. 그런데 이 남자에게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가 심어놓은 사랑의 씨앗이 마음의 밭에 너무나 깊게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매일 꺼내서 잘 자라는지 확인하거나 불안해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강건하게 나에게서 열매를 맺어 가는 중이었다. 사람에 대한 신뢰, 그 것이 나에게는 가장 큰 사랑의 실체였다.
이 사람이라면 나를 평생 위해주겠구나. 내가 똥으로 메주를 빚는다고 해도 믿을 사람이야.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할지라도 마음 하나는 풍요롭겠구나. 나를 매일같이 세워 줄 사람이 있다는 건, 존재의 이유이기도 하다.
내 우주에 들어온 너인줄 알았더니 네 우주가 좋아 돌아가고 싶지 않은거였어.
룸메 남친의 조언이 맞았다. 나에게 확신이 필요했다. 그 길로 나는 사주가 뭔지 공부 좀 해보자 싶었고, 유투브에 올라온 사주니 철학이니 하는 것과 관련된 강의를 듣고 국회 논문들을 뒤져 읽기 시작했다. 알아갈수록 힘들었다. 읽을수록 고뇌는 깊었다. 그러다 우연히 지금은 흐려져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나라 사주명리학의 대가라는 분의 강의를 듣게 되었다.
아픈사람, 돈 없는 사람.. 웬만큼 사주가 다 들어맞는다. 그 사람 사주를 보면 죽음이 가까이 와있다는 것도 보이고 이별수도 보인다. 그런데 사주를 오랫동안 보다보니 한 가지 알게 되었다. 사주가 아무리 좋다한들 마음가짐이 틀려버리면 헛것이요, 사주가 아무리 세다 한들 마음을 독히 먹음 것 또한 이겨낸다는 것을. 죽고 사는 것이 이왕 정해져 있다면 마음이라도 단단히 먹으라고 사주를 봐준다.
"사주보다 중요한 것이 심주이다."
사주보다 중요한 것이 심주이다.
나에게 가장 필요했던 말을 듣고야 말았다. 명언을 되새기고 그로부터 나는 엄마를 설득하고, 남자친구인 그의 마음도 안심시켰다. 그는 계속 이시험 저시험에 도전하고 낙방했지만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시간은 또 일 이년 쉽게 흘렀다. 큰 문제라고 여겨 매달려 있기보다는 차라리 나라도 시간을 유용하게 쓰길 권했다. 하고 싶은 일하며 다니고 싶은 데 다니면 좋겠다고, 너는 그래야 하는 체질이라며 오히려 나답게 살지 못할까봐 그는 걱정했다. 나의 세계에서 원하는대로 살아가길 바라던 그의 진심이 느껴졌다. 그의 바램대로 일하며 대학원도 다니고 각종 동호회 활동도 하고, 틈틈히 여행도 다녔다. 42일간의 여행을 떠날 때 그는 유부초밥을 손수 싸왔다. 또 언젠가는 오랜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나에게, 한참이나 되었는데도 못알아봐서 고백한다며 담배를 끊었댔다. 해줄 수 있는 게 이런 것 밖에 없다며, 하루하루 기다리는 마음으로 금연을 한 것이었다.
어느새 서른 두살, 아직 그는 헤매이는 중이었고 나는 이력이 났지만 믿음은 여전했다. 사랑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마음 하나는 굳건했다. 인도의 다양한 신들께, 터키의 모스크에서는 알라신에게, 그리고 유럽 등지의 성당을 둘러볼 때면 하나님에게.. 일상으로 돌아와 불교법전 보시가 좋다는 얘길 듣고 부처님에게도 매달려 보았다.
그가 잘 되길 바라는 건 제 욕심입니다. 그냥 제 마음이 변하지 않고, 계속 사랑과 믿음으로 나아가게 해주세요.
칠흙같은 어둠 속에서 별은 더욱 빛나고 있었다. 너라는 존재도 나라는 존재도 열등도 우월도 없이 빛나고 있음을 깨우쳐 준 사람이 너라서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