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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일상 Aug 16. 2024

풀리지 않는 너의 인생을 역술가에게 묻다.

답답한 놈이 무당을 찾는다.

내 남자친구가 서른여섯 일곱쯤 되어야 자리를 잡는다는 권보살님의 우울한 점괘 이후로도 우린 굳건히 만나왔고, 어느새 연애기간은 9년을 채우고 있었다. 대학을 중퇴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공부를 병행하고, 그러다 시험에 떨어져 낙심한 그를 만나고... 그 시간들의 반복은 어쩌면 권보살님의 말이 맞아들어간다는 증같았다.


그러나 헤어질 수 없다.  서로에게 길들여진 우리는 서른이 넘어 다른 사람을 만나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무엇보다 편하고 위로가 되는 사람이었다. 가족에게도, 가장 친한친구에게도 속시원히 하지 못하는 얘기를 그에게는 할 수 있었다. 언제나 내편이니까. 그가 아니었으면 공허하게 붙잡아 두었을 시간들도, 아깝게 흘러버린 날들도 많았을테다. 연민과 사랑, 불안과 안정, 그 사이 어디쯤일지 모르지만 분명 그와 많은 시간들을 채워 나가고 있었다.


엄마는 늘 그랬듯 묵직한 존재였다. 권보살님의 사주풀이 이후로 못헤어진다고 결정 내린 딸의 마음을 받아들여 주었다.

-그래, 살아보니 나 위하는 마음이 최고더라. 착한 남자랑 살아라.

엄마는 우연히 보게 된 남자친구를 그냥 지나치기 그랬는지 30만원을 슬쩍 건넸다.

-백화점가서 티셔츠 사입혀.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사윗감이 중간치는 되어야지 하고 바라는 건 세상 모든 엄마들의 속내다. 우리 집만큼 살고, 내 자식만큼은 배우고, 내 자식과 비슷한 직업은 가졌으면 했을테다. 그러나 엄마는 그런 마음을 모두 내려놓고, 그 남자가 좋다는 딸의 마음만 오로지 들여다 보고 있었다.


엄마는 친구가 없다. 농사 일도 그렇거니와 외도를 밥 먹듯 하는 아빠는 의처증까지 있어 엄마 스스로 바깥활동을 꺼려했기 때문이다. 동네 사람과 몇마디 잘 못 나누거나, 일이 있어 전화 통화를 몇번 거듭했다가는 아빠의 망상을 틀림없이 만들어 냈다. 정상적 사고가 되지 않는 사람이 만들어 낸 망상과 맞닥드린 엄마의 억울함이란 말로 해 무엇하랴.


이른 새벽 엄마가 깨끗하게 단장하고 사나흘에 한번씩 찾는 곳이 법당이다. 무속이니 어쩌니 해도 엄마의 살아온 인생을 알기에 엄마가 의지할 곳이 있어 딸인 나는 좋기만 했다. 그래, 오늘은 어떤 마음으로 찾았니 어떤 말들이 오갔니 얘기를 듣고 있으면 흥미롭고 신기한 것들도 많았다. 게다가 여기저기 옮겨 다니던 엄마가 수년째 안착한 곳이니 그곳 보살님과는 자매처럼 지낸다. 집에 크고 작은 문제들이 발생할 때마다 많은 도움과 정성을 보여 주셨기에, 엄마의 정신적 지주라 할만했다.


아빠도 법당의 보살님 말만큼은 잘 따랐다. 타고난 싸움꾼인데다 재산욕심이 많은 아빠는 각종 송사에 휘말리는 법정 단골손님이다. 그럴때마다 신경써주신 보살님이 고마웠던 모양이다. 또 자신의 외도 상대인 여자를 보살님이 알아차리고 따끔하게 충고해 주니 나름 갈피을 잡는 데 도움이 된 것인지 오히려 엄마보다 자주 찾아가 조언을 구하곤 한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도 집에 가서 요양원의 전화를 기다리라는 당부도 해주었고, 조카의 심장수술이 잘못되어 대학병원에 식구들이 마지막 인사를 하러 모인 날도 쓰러진 언니의 뺨을 쳐 정신차리면 좋은소식 들린다는 가닥없는 희망을 주었다. 그런데 다음 날 수술을 집도한 교수님이 수술 전으로 되돌리는 수술을 다시 하기로 결정하고 아이의 목숨만은 살릴 수 있었다.


그러니 보살님이 우리집 사정을 빤히 아는 것은 물론이요. 자식들인 우리들의 속내까지 들여다 보고 있는 듯 했다. 하루는 보살님에게 남자친구를 데리고 법당으로 오라는 지령을 받았다. 무섭고 두려워 망설이다가 한번쯤은 가보자는 결심이 섰다. 재미로 보는 타로카드나 잠깐씩 들리는 사찰 같은 곳이 아닌, 무당의 부름을 받고 가는 법당이었다.


끝내 애가 끓은 엄마가 보살님에게 우리를 결혼시킬 방안이 없겠냐고 논한 모양이었다. 4년 전쯤 권보살님의 사주풀이, 못내 헤어지지 못한 우리는 또 다시 다른 역술가 앞에 가 우리의 앞날이 점쳐졌다. 그때와 달라진 게 있다면 헤어지기 위한 것이 아닌, 결혼하기 위함이다.


낯선환경 정도가 아니라 무서운 환경이다. 장군님 상을 비롯한 각종 신들에게 절을 따라 하며 내 옆에 바짝 붙어 앉은 남자친구는 의연한척 했지만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휴우, 휴우. 오빠야 니.. 고생이네. 와이렇노. 왜이렇게 되는 일이 없노. 이 언니 아니었으면 오빠야 니.. 오빠야 니 부모복 없다. 부모님도 힘들다. 부모님 힘들게 사시제? 엄마가 아프시네? 그래도 자존심은 억수로 세네. 티 안내려고 겉은 평온한척하네. 머리는 좋다야. 공부도 잘했네. 근데 자꾸 문턱 앞에서 막히제. 오빠야 대학도 그랬제?


보살님은 어쩌면 엄마에게 들어서 모두 알고 있는 것들일 수 있지만, 남자친구에게는 절절한 현실이었다. 살아온 인생이었고 답답한 현실이었다. 그리고 살아갈 앞날에 대한 희망은 버릴 수가 없기에 자기발로 나를 따라 나선 것이었다. 보살님은 남자친구를 오빠야라 칭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계속 쏟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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