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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일상 Sep 06. 2024

자네, 다시 공부하게.

주말이면 처갓집에 와서 잠만 자는 사위가 엄마 눈에는 어때 보였을까

청실홍실 맺어준다는 굿을 하고 그토록 바래왔던 결혼을 덜컥 하고 보니 남편은 아직 무직이다. 남편의 선배는 현지여행사를 하는 지인을 통해 저렴하게 신혼여행을 다녀오라며 경비만 받아 챙겼다. 경제적 여유가 없었던 우리에게 그 몇백만원을 사기친 인간이 남편의 지인이라니. 여행을 자주 다니던 나로서는 e-티켓을 왜 보내주지 않냐며 결혼식날 아침까지도 남편에게 토로했지만, 그 모든 흐린 상황을 결혼이라는 도파민으로 극복했다. 국제선 2층으로 가라는 선배 말은 믿지 않았지만 몸은 따르고 있었다. 여행을 다녀온 출국 인파에 묻혀 경전철을 타고 신혼집으로 다시 돌아오는데 기분이 묘했다.


이 사람, 서른여섯 일곱살이나 되어야 돼! 그 전에는 뭘해도 안돼!


우리 나이 서른셋, 나도 모르게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문득, 이 사람이 자꾸 힘든 일이 생기면 잘 살 수 있을까. 신혼에 자꾸 싸우게 되지 않을까. 애써 신혼여행 사기를 액땜으로 몰아가며 우리들의 결혼생활 시작을 보리밥집에서 자축했다. 그리고 다음날 신혼여행지를 물색해 떠났다. 


기다리던 시험결과는 좋지 않았고, 중퇴라 고졸인 학벌로 직업을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할줄 아는거라곤 공부이거나 잠깐씩 했던 아르바이트가 전부였다. 관련학과를 졸업해서 대학네임벨류로 무난히 취직하리라 생각했던 그였다. 예상치 못하게 흐른 청춘의 시간을 옆에서 함께 했기에, 친구들에게 쓴소리를 들으며 전화기를 내려 놓는 그를 보자니 마음이 아려왔다.


-뭐래? 소개시켜줄 자리가 있대?

-아니, 정신차리라는데. 학벌이 안되는데 눈만 높다고 중소기업도 힘들거래.


여기저기 취직부탁을 하고자 전화를 돌리다가 신혼여행을 망친 선배라는 인간에게 전화가 왔다.

-취직자리 알아보고 있다며? 지난번 일도 본의 아니게 미안하고 해서, 괜찮은 무역회사에 말해 뒀어. 밥한끼 해야 할 것 같은데 식사비 정도는 내야되지 않겠어?


식사비는 40만원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말도 안되지만 또 선배에게 송금을 했다. 친구들에게 한껏 자존심이 밟힌 그의 심리를 이용한 선배, 어쩌면 신혼여행날 아침처럼 흐렸지만 취직에 대한 도파민으로 또다시 무역항으로 향했다. 알려준 기업을 검색하고, 지도에서 위치까지 찾아 확인했던 터였다. 그러나 그 곳에 도착하면 전화하라던 선배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남편은 마음이 급했다. 나는 안정적인 일을 하고 있었지만, 허니문베이비가 뱃속에서 자라고 있었다. 쓰리룸에서 신혼을 보냈는데, 지역에서 가장 저렴한 아파트를 분양받은 상태였다. 늘 돈에 쫓기는 심정으로 자란 그였기에 아기가 태어난다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더 알아볼 필요도 없이, 그는 공장에 취직을 했다. 손톱끝이 새까매져서 돌아오는 그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아팠다. 노동의 가치가 중요하다 한들 그의 몸무게는 크게 줄어들고 있었다.  


아이는 태어났다. 건강한 남자아이였고 육아는 서툴지만 여동생의 도움으로 나는 일을 쉬지 않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와 지쳐 잠들 때면, 야간초과근무까지 하고 돌아온 그는 매일 소주 한병을 기울이는게 낙이었다. 그런 우리 사이가 소원해지는 건 당연했다. 


친정에 가서 나는 자매들, 아이는 1-2살 차이의 어린 조카들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매주 주말마다 모여들었다. 나이는 제일 많지만 항상 아이들에게 눈을 떼지 않고 돌보는 막내제부와 달리 남편은 늘 안방 침대에 눕기 바빴다. 낯빛도 어둡고 살이 많이 빠져 행색이 말이 아닌 남편을 보고 있자니 친정 엄마는 한숨이 절로 나오는 모양이었다. 엄마는 늘 그랬듯, 내 자식 도울 방법만 생각중이었다.


자네, 다시 공부하게. 지금은 돈버는 게 중요한 것 같아도 세월 지나보면 젊을 때 1-2년은 아무것도 아니네.



엄마보다 앞서 남편에게 이직을 준비해 보라며, 일을 쉬어도 좋다고 설득을 여러번 해본 터였다. 하지만 당장 벌어야 한다는 생각이 완강했던 그가 장모님의 말에 결심을 한 것이었다. 엄마 말이 맞았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 시절의 1-2년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학원비를 지원해 준 엄마 덕에, 서른 여섯일곱에 인생이 풀린다는 그의 사주 덕에 남편은 서른 여섯에 공무원이 되었다. 그해에 둘째도 함께 우리 부부에게 찾아와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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