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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일상 Jul 12. 2024

골고루 사랑을 나누어 준 나의 어머니

그저 미안해서 그랬다

나는 다 크고서야 나의 엄마와 친구들의 엄마가 다르다는 걸 알았다. 엄마와 딸의 사이는 그저 우리 같다 생각했다. 측은하게 여기기 끝이 없는줄 알았다. 그래서 친구들이 엄마 욕을 하거나 다퉜다는 식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면 어떻게 말해 줘야 할지 몰라 그저 듣기만 했다. 성적이나 스케쥴 관리때문에 딸이 엄마랑 싸우다니.. 나에게는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한 때는 엄마의 성품을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하며, 고맙게도 참 특별한 엄마를 두었다 여겼다. 그 사실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서늘하도록 아픈 엄마의 표정이 떠오른다. 무표정하고 지쳐보이는, 그래서 때론 무관심이 우리의 사이를 편하게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이른다. 결혼하고 가정을 이뤄 보고서야 엄마를 제대로 마주 하는 느낌이다. 자녀에게 어느정도 무관심하기란 관심을 주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는 것을 말이다.


엄마의 사랑법에는 욕심이 없었다. 엄마는 좋은 경청자적 태도를 지녔다. 엄마는 들어주기만 할 뿐 결론을 내려 주는 법이 없었다. 혼자서 지겨울 때까지 말하도록 두고, 그러다가 제 스스로 결론에 이르기까지 곁만 내주었다. 농사 일을 하는 엄마 곁에 졸졸 따라다니면 귀찮을 법도 했을테지만 엄마는 한번도 일하니까 저리가라는 식의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일에 방해가 된다 싶으면 그랬다.

-우리 둘째는 말이 많아 쓸 말이 적겠다 

결정적으로 말이 많아지는 순간 가장 빨리 출력되는 격언이 되어버렸다. 자녀를 키워보니 듣고 있기란 고수인 부모만 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생각이 어리다 여겨 경험자로서 좀 더 빠르고 바른 해답을 내려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나 자신을 늘 발견한다. 인간관계에서 피해주지도 받지도 않아야 된다는 신념, 학교나 학원생활에 대한 책임감 강요 등 매일같이 이어지는 대화는 일방적인 결론 내려주기에서 끝나고 있었다. 영어학원이 힘들다는 아이에게 쉽게 포기하면 안되니 버티라고 했고, 매달 오는 수학학원 단원평가지를 모른척하면도 꼭 한소리씩 덧붙였다. 겨우 초등학생 자녀를 키우는 데도 이토록 비워지지 않는 것이 욕심인데, 엄마는 시집 보내도록까지 어떻게 입을 닫고 살았던 걸까.


엄마의 사랑법에는 현명함이 있다. 일머리로 보나 상황판단력으로 보나 엄마는 아빠를 늘 앞섰다. 사회적 활동을 전혀 하지 않는 엄마를 따르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적재적소에 약이 되는 말만 하는 타입이었다. 한번은 항암치료중인 동네 아저씨가 야유회 자리에서 '우리 동네에서 가장 지혜롭고 귀중한 사람'이라며 엄마에게 술 한잔을 권했을 뿐이다. 그 길로 아빠는 사람들 앞에서 엄마에게 손찌검을 했다. 언제는 3대 장손인 아빠 덕에 친인척들이 끊임없이 집으로 모여들었는데, 모두 엄마를 칭찬하기 여념이 없으니 심술난 아빠는 냄비던지기 같은 화풀이 방식으로 십수일간 엄마를 못살게 굴었다. 엄마의 지혜는 때론 엄마를 불행으로 몰아 넣었다. 그러나 그 수혜자는 우리 4남매였다. 


성격이 급하고 자기 검열이 약한 언니에게는 눈빛으로만 바라봐 주었고 잘못을 저지르고도 굽힐 줄 모를 때는 오랜 시간 대문 밖에서 함께 서서 기다려 주었다. 화가 난 아빠가 매질을 할 때도 품 속에 감추고 함께 맞아 주었다. 그러면 언니는 엄마에게 펑펑 울며 잘못했다고 품안으로 들어왔다. 젊은 날, 엄마의 패물을 모조리 가져갔던 언니는 결혼하고서야 패물을 다시 해왔으니 이 또한 오랜 기다림 끝의 결실이 아닐까. 한 살 어린 나는 늘 옆에서 지켜보며 불안과 와해를 왔다갔다 하며 지냈다. 언니와 아빠와의 갈등이 잦자 고등학생 때 독립을 결정해 자유를 준 사람도 엄마였다. 그 자유가 언니를 방황하게 했을지라도 엄마는 알고 있었다. 언니는 절대 매여 지낼 수 없다는 것을. 결국 스스로 돌아와 엄마의 품에 안길 때까지 잡아 둘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차라리 놓아주었다. 언니는 실제로 4년간 연락을 끊고 지냈고 그 세월동안 엄마의 가슴은 피멍으로 얼룩졌다. 또 나는 그 고통을 20대에 그대로 관통하며 느껴야 했다. 결국 언니는 돌아와 더욱 건강한 사회구성원이 되었고 파란만장했던 20대를 후회하며 30-40대를 더욱 굵게 맺고 있다. 


 노상 관계에서 헤매이는 나의 이야기는 그저 오래 들어주었다. 진학이든 취직이든 다시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든 그저 내 선택을 존중하고 지지해 주었다. 끈기있고 눈치껏 하는 아이라며 그저 믿어주었다. 온 집안의 기둥인 남동생과 연년생인 여동생은 유독 서러움을 많이 탔다. 엄마는 여동생에게는 공주라는 애칭을 붙여 자주 어루어 주었으며, 가끔 여동생만 데리고 나가서 외식도 하고 쇼핑도 하며 사랑을 특별하게 부여해 주었다. 여동생은 지금도 스타일이라면 지지 않는 멋쟁이다. 결혼을 해서도 목욕탕이며 외식이며 1주일에 한번씩 가서 엄마를 챙기는 것은 여동생이다. 여동생은 그 사랑법을 그대로 배웠다. 나 또한 사랑법을 그대로 배웠을까. 자식들을 다 시집장가 보내고서야 여지껏 제 성질껏 살아가는 아빠에 대해 신세한탄을 하는 엄마의 이야기를 가장 많이 들어 주는 딸은 나이다.  제 잘난 맛에 살아가는 막내동생에게는 호기심과 욕구를 채우는데 끊임없는 제공을 해주었다. 마흔살이 되어서도 허영심으로 가득한 남동생을 볼 때마다 딸들은 엄마 탓으로 돌리곤 한다. 그래도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아. 

-지나간 일을 탓해 봤자 소용이 있나. 그리 살다보면 깨달을 날 오겠지. 도움 안되는 소리 너희들고 하지 마라.


엄마의 사랑법은 늘 그랬다. 원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차렸다. 스스로 행복하다 여기는 삶을 제 꼴대로 살게끔 해주었다. 엄마의 욕구나 바램은 전혀 깃들지 않았다. 옳고 바른 삶을 가르칠 줄 몰라 그저 입닫고 산 것이 아니었다. 


실수에도 나무람보다는 해결책을 제시하는 게 엄마의 사랑법이었다. 육아서를 몇십권을 읽어도 잘 실천되지 않는 것 중에 하나이다. 행동이나 말이 가져올 여파를 생각하면 화가 나 아이들을 나무라는 게 항상 먼저다. 그럴때마다 신랑에게서 돌아오는 말이 있다.

-장모님의 십분의 일이라도 실천해 보면 안될까.

엄마는 우리 4남매의 매일같이 잦은 실수에도 화나 짜증을 내지 않았다. 다만 가장 빠르게 해결하고 마음을 가볍게 할 수 있는 돌봄을 선택했다.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해결책을 알려주었다. 엄마 말대로라면 틀림없이 느꼈던 양심의 가책도, 행동의 후회도 가벼워져 있었다. 다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시간될 때 조근조근 일러주었기에 수치심도 덜했다. 초등학생일 때 언니와 나는 옆동네에 수영을 하러 갔다. 제법 깊은 강이었기에 소식을 들은 아빠는 화가 나서 우리를 찾으러 왔고 우리가 그곳에 없자 헛걸음과 불안이 함께 섞이었다. 자전거 한 대에 앞뒤로 앉아 돌아온 우리를 대문 밖에서 엄마는 기다리고 있었다. 질책보다는 위험한 곳에 간 우리에게 화가 난 아빠에게 잘못한 점을 먼저 시인하고 용서를 비는게 우선이라고 일러주었다. 간신히 매질은 피했지만, 엄마의 한마디가 너무 강력히 와닿았다. 


엄마가 일러두었던 전화 한통이 내 20대의 해법이었다. 중학생이던 언니와 나는 시내 나들이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쏘다녔다. 밤늦도록 돌아 오지 않은 우리를 내보냈다며 아빠는 엄마에게 발길질을 해댄 모양이었다. 어린 여동생과 엄마는 마을 버스 몇 대가 지나도록 하염없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린 우리를 보고 동생이 펑펑 울었다. 하지만 엄마는 그때도 우리를 책망하는 내색없이 무겁게 걷기만 했다. 초여름이라 해가 길어 새벽 5시면 일어나 밭일을 하고, 아침 해먹이고 다시 농사일을 한 엄마의 다리는 그 시간이면 천근만근이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엄마는 자신의 감정이나 상태는 숨긴채 아빠에게 진정으로 잘못을 빈다면 용서가 돌아올 것이라는 당부만 해두었다. 늦게 되면 전화만 해도 걱정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과 함께. 그로부터 고등학생, 대학생이 된 나는 훨씬 자유로웠다. 언니의 이만저만한 큰 사연들이 아빠를 좀 유연하게도 만들었고, 제 길을 찾아 끈기 있게 공부하는 내 모습에서 신뢰도 쌓았다. 대학 초년 시절 술도 잦았고 친구들과 즐거움에 취해 클럽도 제법 다녔다. 새벽공기를 밟아야 하는 날도 많았지만 나는 늘 아빠를 안심시켰다.


나는 엄마에게 가끔 묻는다. 언니도 묻고 여동생도 묻는다. 엄마는 우리에게 왜 잔소리를 하거나 화를 내지 않았느냐고. 그럴때마다 엄마는 같은 말을 들려준다.

-미안해서. 아빠도 성질이 별나지. 할아버지도 잔소리가 심하지. 너희한테 미안해서 그랬지.

나도 본능적으로 알았다. 엄마를 힘들게 하지 않으려면 아빠나 할아버지의 말에 잘 따라야 했다. 그것이 엄마가 우리에게 나눠준 사랑의 본질이었다. 때론 아프고 힘들게 다가온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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