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소연
사랑은 늘 결함과 함께 온다!
사랑해서 망가지고, 미워해서 더 가까워지는 사람들을 담은 책
사랑, 결함.
상반된 용어이다.
무릇 사랑이라 하면 결함이 없어야 그 이름값을 한다.
결함이 있다는 것은 이미 사랑이라 이름 부르기 적절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달달한 사랑이야기가 넘쳐나는 시대에 이 상반된 이미지인 '사랑과 결함'이라는 제목만 보아도 이 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이 소설집의 인물들은 사랑이라는 미명아래 서로를 상처 주고 할퀴고 종국에는 갉아먹고 철저히 파괴하다가 돌아서면 다시 지독한 사랑을 결심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서툴렀기에 오해와 갈등으로 얼룩지고, 자주 증오하고 가끔은 화해하지만 그 비틀림도 사랑이었음을 인정하게 한다.
데뷔 3년 만에 이효석문학상·문지문학상·황금드래건문학상을 석권하며 한국문학의 기대주로 자리매김한 예소연의 첫 소설집 『사랑과 결함』
요새 가장 핫한 소설 작가 중 한 분인 예소연 작가님.
2021년에 '현대문학' 신인 추천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등단 4년 만에 2025년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했다. 은희경 작가님 이래로 등단 후 최단기간 대상 수상자이자 김애란 작가님 이후로 최연소 대상 수상자이다. 제13회 문지문학상, 제5회 황금드래건문학상, 제25회 이효석문학상 우수작품상을 받았으며 소설집 '사랑과 결함', 장편소설 '고양이와 사막의 자매들'이 있다.
짧은 시간에 이리 화려한 약력을 가진 작가에 대한 신뢰와 기대가 최대치를 돌파한다.
작가 예소연은 “사랑하는 사람을 제일 미워하고, 미워하는 사람을 제일 사랑하는 마음” 으로 이번 소설집의 표제작-사랑과 결함-을 썼다고 밝힌 바 있다. (문지문학상 수상 소감)
우리 철봉 하자 _007
크로스핏 센터에서 만난 맹지와 석주가 서로의 삶에 침범하며 관계를 맺어가는 이야기
아주 사소한 시절 _035
초등학생 희조가 친구 미정과의 관계에서 삶의 불가해함을 깨닫는 성장기
우리는 계절마다 _075
중학생이 된 희조가 과거의 사건과 재회하며 관계의 복잡함을 경험하는 이야기
그 얼굴을 마주하고 _111
고등학생 희조가 세상의 옭아맴 속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느끼는 이야기
사랑과 결함 _147
조카 성혜와 고모 순정 사이의 복잡한 감정을 통해 사랑과 미움의 경계를 탐색하는 이야기
팜 _189
기후 위기에 관심을 가지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는 해나의 시선을 그린 이야기
그 개와 혁명 _217
노동 문제를 비판하면서도 가사 노동에 침묵하는 아버지와 딸 수민의 관계를 그린 이야기
분재 _251
칠십 대 여성 차연의 죽음을 통해 딸 수진과 손녀 윤재로 이어지는 삼대 여성의 관계를 조명하는 이야기
도블 _283
진경과 승혜언니, 나-에어비앤비 예약자명 카일리- 셋이 강화도 여행을 계획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고, 먼저 와 있던 델마라는 할머니와 에어비앤비 관리자의 묘한 우정을 그린 이야기
내가 머물던 자리 _309
정선의 배신에 화가 난 시연은 셰어하우스에서 친해진 미리내와 함께 정선을 만나고 거기서 마주하는 감정선을 담아낸 이야기
이 책은 총 10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고, 2025년 이상문학상 대상 수장작인 '그 개와 혁명'도 수록되어 있다. '사랑과 결함' 또한 2023년 문지 문학상 수상작이다.
'아주 사소한 시절', '우리는 계절마다', '그 얼굴을 마주하고'는 연작이다. 희조와 미정이의 어린 시절과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에 걸쳐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해 가는 모습을 그렸다. 고구마를 100개는 먹은 듯한 답답함과 안타까움으로 몇 번이나 책을 덮었다. 희조의 삶이 좀 더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읽었지만, 나아지는 게 별로 없는 현실에서 희조는 계속 실수하고 미워하며 또다시 사랑한다. 결함투성이이었던 과거의 자신을 알지만 현재에도 여전히 상처와 결함투성이라는 것을 뼈아프게 확인한다.
표제작인 '사랑과 결함'과 이상 문학상 수상작인 '그 개와 혁명' 그리고 구순 어머니가 자꾸만 떠올라서 감정이입이 제대로 된 '분재'의 밑줄 그은 문장을 위주로 리뷰를 써 본다.
사랑과 결함
잠을 오래 자다 보면 고즈넉하게 늙는 기분이 들었다. 남몰래 시간이 흘러가는 그 느낌이 치열하지 않아서 좋았다.
모든 힘을 소진한 사람처럼, 임종을 앞두고 고모는 숨 쉬는 것조차 힘에 부치는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아버지도 나도 아닌 엄마를 아주 오랫동안,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간신히 신음처럼 말을 뱉었다. 민애야. 그런 다음 눈을 감았다. 우리 중 아무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다만 나는 그 순간 우리 가족이 가진 축축하고 퀴퀴한 기억들이 전부 엉켜버렸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저도요.
평생 증오하던 민애-성혜의 엄마-를 생의 마지막 순간에 부르는 이름이 되다니. 올케인 민애와 시누이 순정 사이의 오랜 미움은 누구보다 서로를 사랑했었다는 모순된 결말에 정신마저 아뜩해진다. 그들의 관계는 도대체 무엇인가. 엄마는 미워하지만 조카는 무지무지 사랑하고, 그런 고모를 사랑하지만 엄마를 뛰어넘을 사랑은 아니기에 느끼는 순정의 절망이었을까. 결함 투성이지만 결국은 사랑으로 치환되는 매직을 선사한다.
그 개와 혁명
태수 씨가 옛날에 그런 적이 있었다. 아빠는 죽으면, 장례식은 재미있게 하고 싶어. 그래서 처음에 수진은 나에게 그렇게 제안했다. 태수 씨의 영상을 만들자. 그러나 나는 마른 모습의 태수 씨를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건 태수 씨도 원하지 않을 거라고, 그건 우리 입장일 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러자 수진이 태수씨에게 직접 물어본 것이다. 나는 처음에 그 사실을 알고 화를 냈지만, 막상 직접 만난 태수 씨는 묘한 활력에 들떠 있었다.
나도 가끔 이런 상상을 하곤 했다. 내가 죽어 좁은 관 속에 들어가 있기 전에 이미 천국행 기차표는 예매했지만 아직은 시간이 조금 남아 있을 때, 나의 장례식을 내 눈과 내 귀로 듣고 싶다. 보고 싶었던 얼굴, 봐야만 하는 얼굴, 사과해야 하는 사람. 모두 초대(?)해서 일평생 고마웠노라. 매 순간 그리웠노라. 노래하고 춤추며 파티를 하자. 태수 씨의 마음과 닮아있는 나의 소망이 더 선명해졌다.
장례식장은 말 그대로 난장판이 되었다. 유자는 장례식장 곳곳의 냄새를 맡고 음식을 먹느라 바빴고 벽에다가는 오줌을 누었다. 직원들이 유자를 잡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지만 쉬이 잡히지 않았다. 유자는 내가 있는 곳으로 한달음에 달려와 꼬리를 흔들었고 나는 유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엄마가 울며 소리를 질렀다. "니들 진짜 미쳤니?" 나는 수첩을 들어 엄마에게 해야 할 말을 찾았다. 그리고 해 오던 것과 같이 최대한 태수 씨의 말투를 흉내 내며 말했다. "공여사 자중하시오. 우리의 적은 제도잖아." 그러자 엄마, 공여사가 허탈한 표정으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유자는 태수 씨의 바람대로 길길이 날뛰었다. 화환과 국화꽃을 물어뜯고 이곳저곳 냄새를 맡고 사람들을 향해 짖어댔다. 나와 수진은 서로 은근한 눈짓을 주고받았다. 장례식장 직원들이 성식이형을 끌고 나갔다. 성식이 형은 끌려나가면서도 유자의 만행을 끝까지 지켜보려고 했다. 나는 비록 눈물이 차올랐지만, 활짝 웃고 있는 태수 씨의 영정 사진을 보면서 같이 웃어 보였다. 수진도 그랬다. 그것이 이태수 씨의 마지막 지령이었기에.
모든 일에 훼방을 놓고 마는 사람인 태수 씨의 장례식장에 태수 씨가 애지중지 키우던 유기견 '유자'를 데리고 오는 이벤트를 진행하면서 아빠 태수 씨의 염원인 재미있는 장례식을 연출하는 두 딸. 평생을 투쟁과 혁명으로 점철된 아빠의 청춘과 가족부양을 책임 진 가장으로서의 괴리로 고뇌했을 태수 씨 인생의 마지막 길, 한 번쯤은 태수 씨의 바람대로 신명나게 껄껄껄 웃으며 떠날 수 있지 않을까. 이렇듯 사랑과 결함은 동의어가 되어간다.
그냥 죽고 싶은 마음과 절대 죽고 싶지 않은 마음이 매일매일 속을 아프게 해. 그런데 더 무서운 게 뭔지 알아? 그런 내 마음을 어떻게 알고 온갖 것들이 나를 다 살리는 방식으로 죽인다는 거야. 나는 너희들이 걱정돼.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돈이 더 많이 들어서.
딸 수민과 태수 씨는 그때 처음으로 함께 울었다고 하듯이 심장이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워지며 목울대가 아프다. 살리는 방식으로 죽인다는 건 암투병의 고통과 공포심을 극명하게 떠오르게 한다. 가족들이 감당해야 할 치료비 걱정을 하는 태수 씨의 부성애 때문에 또 한 번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울음을 삼킨다.
분재
가을이 오면 윤재를 불러 맛있는 것도 해주고 화투도 치고 그러자. 휴대폰도 고쳐달라고 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니 발걸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이런 식으로 사는 걸 버텨왔지 싶었다. 내일과 내일모레의 일을 생각하며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그러다 보니 저절로 살아졌지.
홀로 살고 계신 친정어머니 생각에 읽는 내내 먹먹함과 눈시울이 붉어졌던 글이다. 이것도 나이라고 문득문득 허망하고 황망한데 구순 어머니는 무슨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실까. 궁금했는데 여기에 답이 있다. 저절로 살아진 것이다.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는 것이다.
곧이어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지못하고 오른쪽 눈을 감았다. 바람이 이 불어왔고 잎사귀들이 잎사귀들이 슥슥 저마다 속삭이는 소리를 내었다. 쿰쿰한 냄새도 났다. 제라늄이구나. -중략- 감긴 눈을 도무지 뜰 수가 없었다. 전화벨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차연은 받지 않고 천천히 잠들었다. 잎과 꽃, 가지와 흙의 싱그럽고 다채로운 냄새들이 섞여 종국에는 울창한 숲 냄새가 되었다. 그래, 이게 사는 거지. 차연이 생각했다. 그러면서 오늘 저녁에는 잡곡밥을 한가득 지어다 얼려두자고 다짐했다.
아파트 분리수거장에서 유기식물을 데리고 와서 화분에 심고 비실비실 죽어가던 아이가 싱싱한 초록 팔을 힘차게 뻗고 종국에는 살아 있음의 절정인 아리따운 꽃망울까지 터뜨리게 하는 차연의 모습에 우리 엄마의 얼굴이 오버랩된다. 펄펄 살아있던 식물도 나한테만 오면 유명을 달리하는 똥손이기에, 늘 그런 엄마가 신기했다. 차연과 엄마가 키워낸 것은 분재가 아니라 그녀들의 온전한 삶이었다. 그래, 이게 사는 거지
혼자 사는 삶의 고적함을 망원경으로 들여다보며 우리 엄마의 하루도 차연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아 울음우는 가슴으로 읽었다.
어쩌자고 늘 함부로 마음을 주고야 마는 걸까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애틋한 몸부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