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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의 삶

진짜 인생

by 정유스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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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고 보는 작가 '김영하'작가의 따끈따끈한 신작 산문이다. 60만 명이 넘는 독자의 사랑을 받은 '여행의 이유' 이후 6년 만에 선보이는 산문집으로, 유료 이메일 구독 서비스 '영하의 날씨'에 2024년 연재되었던 글을 대폭 수정하고 다듬어 묶었다.

'단 한 번의 삶'이라는 제목은 너무나 평이하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줄 아는 나이만 되면 모든 이가 다 아는 뻔한 이야기 아닌가.

'김영하'라는 네임밸류로 눈에 띈 이 책은 쉬운 제목 속에 어떤 심오한 내용의 글이 있을까? 하는 호기심으로 책장을 펼쳤다.


'이 세상으로 나를 초대하고 먼저 다른 세계로 떠난 두 분에게'


김영하 특유의 번뜩이는 재치와 전혀 생각하지 못한 깨우침을 주는 문장들이 많았다. 열네 편의 이야기에 담긴 진솔한 가족사와 직접 경험한 인생의 순간을 깊은 사유로 풀어내어서 우리의 발길을 머물게 한다.

특히 자신의 가족사를 알리고 싶지 않은 내용까지도 꽤나 디테일하게 밝히면서 부모님의 존재에 대한 부분을 자식의 입장에서, 부모의 입장으로 돌아보게 한다.


모든 부모가 언젠가는 아이를 실망시키고, 그 실망은 도둑맞은 신발 같은 사소한 사건 때문에도 비롯된다는 것. 그 누구도 그걸 피할 수 없고, 나처럼 어떤 아이는 오랜 세월이 지나서도 그 사소한 한 에피소드를 기억하고, 기억하면서도 충분히 이해하고, 이해하면서도 아쉬워한다. p60


어릴 때 부모는 거대한 산이었고 온 우주였다. 내가 자라면서 어느 순간 부모의 약해진 모습을 만나고, 부모에게 실망하게 되는 지점을 맞이하게도 된다. 부모는 신이 아니라 연약하고 부족한 인간이기에 실수할 수도 잘못을 저지르기도 한다. 작가처럼 영민하고 예민하며 생각이 많은 똑똑한 아들을 둔 부모이기에 더 적나라하게 묘사될 뿐이다.


'엄마의 비밀'에서는 엄마의 처녀 적 직업을 장례식장에서 듣게 된다. 평생 입 밖에 내지 않으셨던 이야기를 엄마의 친구에게서 듣는다. 여군. 아버지가 군인이셨으니 두 분의 인연이 짐작이 간다. 그런데 왜 그 자랑스러운 직업을 끝끝내 아들에게조차 말하지 않으셨을까? 그 당시에는 여자가 직업을 가진 게 자랑이 아니었고 여염집 규수가 신붓감으로 최고였다는 증언을 들으며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낀다.


'아이와 로봇'에서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온다. 세상에 태어난 지 오 년 삼 개월 만에 국민학교에 조기입학하게 되면서 그의 학창 시절은 고난으로 점철된다. 신체발육만 늦은 게 아니라 지력이나 사회성 발달도 뒤처졌던 것 같다. 고등학교 2학년에 특별활동반으로 영어반을 선택했다. 독서가 가장 자신 있는 일이었기에 혹해서 들어간다. '거짓말쟁이'를 원서로 읽었고, 이 단편에 수록된 연작단편집 '아이 로봇'에는 유명한 '로봇 3원칙'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제1원칙: 로봇은 인간에 해를 가해서는 안 안된다. 그리고 위험에 처한 인간을 모른 척해서도 안 된다.

제2원칙: 제1원칙에 어긋나지 않는 한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제3원칙: 로봇은 제1원칙과 2원칙에 어긋나지 않는 한 로봇 자신의 존재를 지켜야 한다.


이 대목을 읽으며 김영하 작가의 베스트셀러작인 '작별인사'의 주인공 안드로이드가 떠올랐다. 그런데 작가도 그런 부분을 글로 묘사했기에 나와 작가가 하나로 연결된 것 같아 뿌듯했다.


단 한번.jpg 아이와 로봇 중



어떤 환대는 무뚝뚝하고, 어떤 적대는 상냥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게 환대였는지 적대였는지 누구나 알게 된다.


이 부분이 섬뜩하다. 마치 츤데렐라. 사회적 가면을 쓰고 웃고 있지만 묘한 밀어냄을 가끔 경험한다.

특히나 격식을 갖춘 자리에서의 냉랭한 기류는 그래서 더욱더 움츠려 들게 한다.

상냥한 환대가 그립다.


# 테세우스의 배


플루타르코스의 '플루타르코스 영우전'에는 영웅 테세우스가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돌아올 때 타고 온 배 이야기가 나온다.


"서른 개의 노가 달려 있었던 테세우스의 배는 아테네 인들에 의해 데메트리오스 팔레우스의 시대까지 유지 보수되었다. 썩은 널빤지를 뜯어내고 튼튼한 새 목재를 덧대어 붙이기를 거듭하니, 이 배는 철학자들 사이에서 '끝없이 변화하는 것들에 대한 논리학적 질문'의 살아 있는 예가 되었다. 어떤 이들은 그 배가 그대로 남았다고 여기고, 어떤 이들은 배가 다른 것이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삶1.jpg 테세우스의 배 중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것이 아니다. 변하면 죽는 것이다. 기타 등등.

흔히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작가는 자신의 예를 들어 엄청난 변화를 거듭했다고 한다. 본인뿐만이 아니라 작가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연령대에 따라 행동도, 마음도, 습관도, 조금씩 달라지다가 그 변화가 누적되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되어버린다고 말한다.

나는 어떨까?

내성적이었던 성격이 외향적으로 변했다.

집곰이었던 내가 집구석 탈출이 지상과업이 되었다.

수박을 싫어했는데 요즘 최애 과일이 수박이다.

운동은 숨쉬기 운동밖에 안 했는데 이젠 운동 중독 증상도 있다.

채소는 시금치 외에는 입에도 대지 않았는데 이제는 채소가 없음 밥을 못 먹는다.

배추김치만 해도 잎 부분을 좋아했는데 줄기 부분만 먹어 치워서 잎은 찌개용으로 쓰인다.

식성도, 성격도, 습관도, 행동도 그러고 보니 많이 변했다.

그래도 아직 죽지 않은 걸 보면 작가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대체 왜 변하는 걸까?

영화나 책을 보면 누군가의 변절, 타락, 성공, 추락, 돌변을 말할 때 굳이 어떤 사건이나 정황을 갖고 온다.

인간은 합리적인 인과관계를 끊임없이 갖다 붙이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작가는 말한다.

"우주의 만물이 그러하고, 내가 그러했듯, 그럴듯한 이유 없이도 인간은 얼마든지 변하고,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오히려 변화보다 더 어려운 것은 변화하지 않는 것이니 이 자연스러운 결과에 굳이 '도발적 시건'을 갖다 붙여 설명하지 말라고 한다. 모든 지도에 축척이 있듯이 실제 세계는 이야기의 세계를 초과한다. 다만 이해가 되지 않을 뿐.

변화와 변절은 분명 다르다.

지켜야 할 무언가를 헌신짝처럼 버리는 변절은 안되고 긍정적인 변화는 얼마든지 환영하고 또 그렇게 되어야 단 한 번뿐인 삶을 보람 있게 살다 갈 수 있다.



"원래 나는 '인생 사용법'이라는 호기로운 제목으로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내가 인생에 대해서 자신 있게 할 말이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저 내게 '단 한 번의 삶'이 이 주어졌다는 것뿐."


지극히 평범한 제목을 쓴 이유가 단박에 이해가 된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시작된 삶이라는 사건, 예측 불가하고 불공평하고 질서 없는 진짜 인생을 사유한 이 책의 마지막을 덮으며 나의 과거를 소환해서 나의 어린 시절, 나의 부모님, 나의 학창 시절의 기억을 더듬고 정리해서 '단 한 번의 삶'을 떠올려 보기로 한다.

우리에게 무방비 상태로 던져진 '단 한 번의 삶'에서 우리는 옳은 선택을 하고 바람직한 방식으로 성장하고 완성을 향해 가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어쩌면, 이 책을 덮는 순간부터 나의 이야기는 시작될지도 모른다.

여러분도 그러하시길.



김영하.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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