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기 위해 내려가다

뒷산 둘레길 단상

by 정유스티나
둘레길.jpg


양평의 愛家에 둥지를 튼 이유 중 큰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집 뒤에 조성된 둘레길이다.

완주하는 데 100분 정도 걸리는 거리인데 중간에 맨발 걷기 구간도 있다.

지금은 바야흐로 맨발 걷기 전성시대이다.

조금이라도 관리한다는 걷기 코스에는 맨발 걷기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늘어나고 있다.

흔해빠진 둘레길이지만 맨발 걷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은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나도 맨발 걷기에 대한 관심이 많기에 보금자리로 낙점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세컨 하우스이지만 있을 건 있어야 하기에 이삿짐이 꽤 되었다.

그 말인즉슨 이삿짐을 들이고 정리하는 것이 만만치 않았다는 말이다.

이사로 인한 피곤함이 가시기도 전이지만 새벽에 집을 나선다.

우리 집 주차장 바로 옆에 언뜻 보면 그냥 지나칠 수 있을 만큼 아주 작은 샛길이 있다.

그 길을 따라 한 발자국만 내디디니 꽤 넓고도 귀한 흙길이 펼쳐진다.

요즘은 어디를 가나 흙길을 만나기 쉽지 않다.

둘레길도 데크라는 이름으로 불편한 옷을 입고 있다.

물론 데크길이 주는 이로움도 있지만 흙냄새 나는 길이 그리웠다.

땅이 주는 기운을 믿기에 내딛는 발바닥 밑으로 좋은 기가 빨려 들어옴을 느낀다.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았는지 오솔길을 침범한 풀이 무릎과 장단지를 간지럽힌다.

간혹 지렁이 사체와 함께 정체모를 벌레들의 습격에 새가슴이 되기도 하지만 비교적 깨끗하다.

새벽의 정적을 깨고 침범한 무법자에게 달려드는 모기가 묻는다.

"넌 어디서 왔니?"

"난, 어제 이곳으로 이사온 여자사람이란다. 이제 그만 물어. 알았지?"


둘레길이라고 무시하면 큰코다친다.

오르막길은 숨이 턱까지 헉헉 차는 가파름이다.

다만 그 구간이 산처럼 길지 않다는 것이 둘레길을 걷는 즐거움이다.


둘레길4.jpg



잔잔한 오르막과 내리막을 거듭하며 내가 정한 정상에 선다.

그곳은 대머리 아저씨처럼 뺀질뺀질해서 맨발 걷기에 안성맞춤이다.

반경 5미터 정도의 큰 동심원을 그리며 둥글게 둥글게 돈다.

물론 내 발을 보호한다는 미명아래 가두었던 신발은 가지런히 벗어 놓는다.


'이 길은 호젓하게 나를 찾는 곳입니다.'


행복을 찾아가는 길.


세속의 번뇌는 잠깐 두고 시작하세요.

천천히 한걸음 한걸음 옮기면서,

발바닥에 느껴지는 땅의 기운을 알아차려 봅니다.


들숨은 코를 통하여 숲의 향기를

느끼면서 아랫배가

볼록하도록 들이마시고,

날숨은 천천히 입으로 내보내면서

숨과 들고나는 것을 알아차려 봅니다.


오직 이 한 가지에만 집중하면서

새로운 힘을 가득 담아 행복한 삶을

즐겨 나가시기 바랍니다.


이 곳을 매일 걷는다면 행복이 내 발자국마다 콕콕 찍힐 것 같은 안도감에 하늘로 두둥실 올라가는 마음을 올려다 본다..


둘레길5.jpg



멀리 계신 엄니께 전화를 한다.

"아이고, 좋은 곳에서 운동하는구나. 좋겠다. 엄마도 같이 걷는 것처럼 기쁘구나."

엄니의 진심을 담은 응원 덕분에 양평살이를 선택한 보람이 행복으로 나를 채운다.

참 잘 했 어 요.

그리고 유튜브의 음악을 플레이한다.

생전 듣지 않던 클래식도 이곳에서는 들을만하다.

지역 주민의 말에 따르면 여기서 다시 '뒤로 돌아' 해서 집으로 온다고 한다.

나는 아직 성에 차지 않고 내 체력은 많이 남아 있기에 다시 내려간다. 반대 방향으로.

작은 구름다리를 건너니 유격 훈련장을 방불케 하는 각종 시설물이 드문드문 설치되어 있다.

단지 내에 있는 리조트에서 단체로 캠프나 수련회에 오는 아이들이 사용하는 것 같다.



둘레길2.jpg



계속 내리막길이다.

숨은 덜 가쁘지만 무릎에 최대한 무리가 가지 않게 하기 위해 발가락에 힘을 주고 걷다 보니 속도를 내지는 못한다. 나이 들면서 제일 크게 와닿는 것이 오르기보다 내려가기가 더 힘들다는 것이다.

평생 사용하지 않는 스틱을 꺼내 든 것도 최근의 일이다.

하지만 여기 둘레길에서는 뾰족한 스틱으로 콕콕 찌르기 싫다.

주위를 둘러보니 나와 같은 마음인 사람이 버린 나무막대기가 눈에 띈다.

이 정도의 타격은 흙에게 덜 미안하기에 마음 가볍게 내 몸을 지탱한다.

'나 왜 이렇게 착해진 거야?'

별 것 아닌 일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내가 우스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전원주택 단지가 보이는 곳까지 내려오면 둘레길을 한 바퀴 돈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우리 집까지는 내가 싫어하는 아스팔트 길을 뙤약볕 속으로 걸어가야 한다.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뒤로 돌아!

다시 둘레길을 오른다.

방금 내려온 그 길을 다시 거슬러 올라간다.

날다람쥐처럼 뛰어서 오른다.

헉헉대는 숨소리와 뿜어져 나오는 땀방울로 내 몸을 정화된다.

이 맛이 좋아서 좀 더 속력을 낸다.



'오르기' 위해 '내려가기'


이제 인생의 시계가 정오는 벌써 지나 한낮의 뜨거움, 그 끝자락에 와 있다.

그렇다고 불 끄고 잠자리에 들 시각은 아니다. 아직 해거름 저녁도 되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은퇴하면 일찌감치 저녁밥을 차려 먹고는 불 끄고 자야 할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아휴, 이 나이에 뭘~"

"평생 열심히 일했으니 이제는 쉬어야지."

"이제 머리가 안 돌아가서 공부도 못해."

"이제 배워서 언제 써먹냐? 써먹을 데가 있기는 하냐?"

각종 핑곗거리를 만들어, 할 이유보다 못할 이유와 안 할 구실만 찾기도 한다.

나 또한 그랬다.

그런데, 그러기에는 친구의 표현대로 지나치게 건강하고-사실 이 말이 살짝 섭섭했다-

머리 팍팍 돌아 가고 졸리지도 않은데 왜 잠을 자야 하지?

그동안 생업과 자식들 키워내느라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일은 저 멀리 밀어 놓지 않았는가.

이제 나에게 집중하자!

내가 원하는 나의 삶을 살자!

기특하게도 이런 생각이 들었기에 이곳저곳 기웃거린다.

그러다 보니 브런치 작가도 되었고, 사이버대학에 들어가 대학생도 되었다.

나는 오르기 위해 내려가기를 자처한 것이다.

양평이 나에게 준 또 하나의 깨달음이다.

'나 이러다 도사 되는 거 아냐?'


둘레길6.jpg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