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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교대생으로 사는 흔들림

비상계엄령과 휴교령

by 정유스티나



1980년, 교육대학교는 2년을 수료하면 교사 자격증이 나오고 순차적으로 발령이 났다.

대학교 소재지인 직할시에 발령이 나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이 별따기였다.

500명 정도의 재학생 중에 10명~20명 정도만 직할시로 발령 나고 나머지는 도내 발령이었다.

대학이라고 하지만 교사 양성소와 같았던 2년제 교대는 교과 과목과 수업 진행이나 반 편성이 고등학교의 연장과 비슷했다.

2학년부터는 전공과목을 선택하긴 하지만 남녀를 따로 반편성을 했다.

내가 다닐 때는 12반까지 있는 것으로 기억되지만 정확하진 않다. 그중 남자 반은 달랑 한 반뿐이었다.

그때부터 교사의 남녀 성비율은 깨지기 시작한다.


나는 대학 2년 동안 교대에 정을 붙이지 못하고 방황했다.

그 당시 교대는 학업 성적은 우수하나 집안 형편이 그다지 좋지 않은 학생들이 많이 지원했다.

물론 이것도 확인된 사실은 아니고 통계적으로 내 눈에는 그렇게 비쳤다는 말이다.

나 또한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기울어가는 집안 형편을 고려하여 내린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나보다 고등학교 때 성적이 낮은 친구들도 4년제 대학에 버젓이 다녔다.

나의 자존감은 바닥에 떨어졌고 당연히 학교 생활이 즐겁지 않았다.

이유 없는 무덤이 없다고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에 갈고닦은 벼락치기는 점점 진화되었고, 쓸데없는 매너리즘에 빠져 의욕조차도 없었다.

진짜, 얼마나 쓸데없는 짓이었는지 금방 닥친 졸업과 함께 발령을 받으며 뼈저리게 후회했지만......

수업만 마치면 여고 동창이 다니는 근처의 4년제 대학 캠퍼스에서 마치 그 학교 대학생인양-아무도 관심도 없었겠지만-죽치고 놀았다. 때마침 미팅으로 사귄 남자애가 같은 대학이기에 더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그러다 보니 교대 같은 반 친구와는 제대로 사귀지 못하고 물에 기름인지 기름에 물인지 그들과 섞이지 못했다.













대학 생활의 풋풋한 낭만을 즐기기는커녕 거시적으로 봤을 때 하등 중요하지 않은 나만의 고민에 빠져서 청춘을 허비할 때, 역사에 남을 큰 사건이 발생했다.


5.17 비상계엄령!


5.18 민주화 운동!


5월 18일 0시를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일원으로 확대한 비상계엄조치가 내려진 것이다.

1979년 10월 26일(10. 26 사)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자 노동자, 농민, 학생, 재야인사 등은 억눌렸던 민주화 요구를 분출하였다. 민주주의 회복을 둘러싸고 다양한 전망들이 발산하는 가운데 12월 22일에 12.12 군사반란으로 전두환, 노태우의 하나회를 중심으로 신군부 세력은 쿠데타를 일으켰다. 신군부는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군 지휘부를 불법 연행하여 군 지휘권을 장악하였다.

권력형 부정축재혐의자와 그동안 사회불안 조성 및 학생운동, 노동운동 소요의 배후조종자를 연행하다는 명분아래 김대중 씨를 비롯한 재야 정치인과 민주인사들을 체포하고 주요 대학 학생회 간부 전원에 대한 검거령이 내렸다. 대한민국 국회해산 및 3김의 정치 활동 규제로 이어졌다. 확대계엄이 발표된 지 두 시간 후 전남대와 조선대 캠퍼스에 공수특전단이 진주했다. 5.18을 무력으로 진압한 전두환과 신군부는 전국비상계엄하에서 국가를 보위하기 위한 국책사항을 심의, 의결하여 대통령의 자문에 응하거나 대통령을 보좌한다는 명분으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언회(국보위)를 설치하여 실질적으로 정치권력을 장악했다. 전두환이 국보위 의장을 맡았다.


학교는 하루아침에 무기한 휴교령이 내려졌다.

45년이 흐른 지금에 생각해도 손에 땀을 쥐게 하고 심장이 방망이질 친다.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자취하고 있던 나는 짐을 대충 정리하고 고향집으로 내려갔다.

언제 끝날 지 모르는 휴교령으로 대학 1년의 회색빛 봄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깨어있고 행동하는 지성인들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걸고 민주화 운동을 할 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화염병과 최루탄이 터지는 캠퍼스의 절규를 너는 귀 막고 코 막고 입마저 틀어막았단 말인가?

학생이 공부나 하지 무슨 운동이야? 하며 혀를 끌끌 차시는 부모님의 주름살과 한숨 때문이었다는 비겁한 변명만 할 것인가?

이런 질문과 대답으로 안 그래도 칙칙한 교대생의 마음은 죄책감과 부채감으로 물 없는 세상에서 서서히 익사하고 있었다.

하루아침에 교문이 잠기고 등교를 하지 못한 전대미문의 비상사태가 풀리고 다시 개강을 한 것은 한여름의 뜨거움은 남아 있지만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가을이 오는 계절, 9월이었다.

짧디 짧은 2년의 대학 생활의 4분의 1이 통으로 날아간 것이다.

최루탄 가스와 화염병의 난무로 신성한 캠퍼스는 짓밟히고, 민주화를 외치던 학생들의 피비린내로 물든 교정은 화단에 핀 한 떨기 꽃마저 숨죽여 울었던 그때 그 시절.

돌아온 캠퍼스에 낭만은 휘발하고 서슬 퍼런 독재의 칼날이 우리를 옥죄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을 축제를 맞이하여 지난 봄과 여름의 상처를 애써 덮으며 제법 들뜬 분위기가 교정 곳곳에서 조심스럽게 피어나고 있었다.

일상으로 복귀하며 새삼 평화로운 날의 소중함을 깨닫고 학업에 몰두하면서 교사로서의 자질을 길렀다.

처음으로 교대생 본분을 찾게 된 것이다.


격동과 혼란의 80년대를 온몸으로 하고 살아 남은 동지들을 위해 치얼스!

조국과 민족을 위해 신념을 굽히지 않고 스러져간 많은 민주 열사들을 위해 묵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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