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벌써 45년이다.
뒤돌아 보면 하룻밤 꿈을 꾼 것 같지만 세월은 속절없이 잘도 흘렀다.
갈래머리 여고 시절, 나의 꿈은 서울에 있는 대학의 학생이 되는 것이었다.
지방 소도시에 살면서 서울 유학에 대한 로망이 컸다.
그리고 '기자'라는 직업이 멋있고 의미 있어 보여서 '신문방송학과'에 가고 싶었다.
학교 성적은 나쁘지 않았지만 지방 소도시의 학업이었기에 부족함도 많았을 것이다.
서울로 유학 가고 싶은 나의 바람과 달리 우리 집 사정은 기울고 있었다.
부모님은 절대 표 내지 않으셨지만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과 한숨 소리가 늘어나는 걸
눈치 못 챌 정도의 무신경은 아니었다..
하지만 딸이 서울로 대학을 가고 싶어 하니 어쩔 수 없이 허락을 하셨다.
서울에 있는 모 대학에 특차 지원서를 제출하면서 안전장치로 교육대학에도 원서를 접수하였다.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두 대학의 면접날이 같은 날이었다.
내 인생을 결정하는 그 밤의 고뇌는 수십 년이 흐른 지금도 바로 어제의 일처럼 생생히 기억된다.
눈물겹다.
그 소녀를 꼭 안아 주고 토닥토닥이고 싶다.
밤새 수많은 고뇌를 거듭하며 동전점까지 동원했다.
다보탑이 나오면 서울, 숫자가 나오면 대구.
뒷 집의 할머니에게도 수차례 묻고 또 물었다.
"서울로 갈까요? 대구로 갈까요? 뒷 집의 할머니께 물어보면 알겠습니다. 짠!"
시작점에 따라 서울로 낙점되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 마음을 속이고 무한 반복해서 묻기도 했다.
긴 밤을 뜬 눈으로 새우고 결론도 못 내린 채 창문이 뿌옇게 밝아지며 미명을 맞이했다.
방문을 열고 맞닥뜨린 우리 엄마의 얼굴을 보면서 결정했다.
나보다 더 퀭한 눈과 수심 가득한 얼굴의 엄마를 보며 서울 진학의 꿈은 체념하였다.
속울음을 삼키며 하행선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렇게 교육대학교에 입학했고, 그날의 선택은 나의 평생을 결정짓는 운명이 되었다.
교육자에 대한 특별한 사명감이나 소명의식 없이 겁 없이 교육계에 뛰어든 교육대학생이었다.
나의 집안 환경으로 어쩔 수 없이 한 진학이었기에 기쁨도 기대도 희망도 없었다.
그냥 우리 엄마 아버지의 무거운 짐을 조금 덜어드리고자 하는 효심의 발로였다.
또한 장녀로서 마땅히 했어야 할 의무이기도 했다.
운명.
그것은 운명이었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비겁한 변명은
결코 행복하지 않을 대학 생활의 예고편이었다.
짧은 대학생활과 첫 부임지에 대한 소회와 기억을 두레박으로 길어
희미해져 가는 옛 추억을 선명하게 말리고 싶다.
80년대의 깊고 푸른 강을 함께 건너온 동지들-동족업계던 인생친구던-과 함께
때로는 눈시울을 적시고, 때로는 먹먹한 감동으로 이 연재를 대하시길 소망한다.
반세기를 거슬러 올라가
끊임없이 흔들리며 피는 꽃이었지만 분명 눈부시게 빛났을
나의 청춘, 그리고 그대들의 청춘을
만나신다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마치 책갈피에 곱게 넣어둔 노란 가을잎을 발견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