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뀐 부임지
땡땡군 교육청으로 발령장을 받으러 가는 길은 소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길이었다.
실제 나는 소띠이기도 하다.
사장님 배의 아버지와 수년 전에 양장점에서 맞춘 아끼는 투피스로 곱게 단장한 어머니.
발령받고 부임한다고 엄마 손에 이끌려 양장점에서 맞춘 회색 투피스 정장 속에 내 마음과는 반대인 화사한 연분홍 블라우스를 입은 나.
흑백 영화의 조연들이다.
그 당시는 기성복이 요즘처럼 입맛대로 나와 있지 않았기에 양장점과 양복점이 성행을 했다.
청바지와 티셔츠와 편한 운동화로 자유롭던 몸이 정장, 그것도 바지는 출근복으로 입지 않던 그 시대의 풍조로 치마를 입고 스타킹을 신고 뾰족구두까지 신었으니 얼마나 부대끼던지.
마음과 몸이 틀에 갇혀 숨쉬기도 힘든 것이 나의 미래를 보는 듯했다.
나보다 더 긴장하면서도 사뭇 들뜬 부모님을 병풍처럼 모시고 가는 부임지였지만 신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정말 선생님이 되는구나 하는 묵직한 책임감과 살 떨리는 설렘도 내 마음 어딘가에서 동행했을 것이다.
시외버스를 1시간이나 타고 교육청에 도착했다.
발령장을 받기 위해 교육장실로 안내되어 갔다.
교육장실 문을 여는 동시에 먼저 와 있는 동기와 어머니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하얀 무명 한복을 입으시고 쪽진 머리를 하신 노모와 학군단 옷을 막 벗었지만 세련하고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동기가 수줍게 웃고 있었다.
흑백 영화의 주연들이다.
나와 함께 발령받은 동기는 딱 1명이었다.
그러니까 땡땡군에 발령받은 사람은 나 포함 2명이었다.
그 동기는 여리고 왜소한 체격에 비해서 목소리가 동굴을 파고드는 매력적인 보이스를 가진 남학생이었다.
같은 반은 아니었지만 남학생의 수가 워낙 적다 보니 그쪽은 나를 모를지언정 나는 그의 얼굴을 익히 알고 있었었다.
기독학생회 동아리 활동을 아주 열심히 하던 믿음이 신실해 보이는 친구라고 기억된 동기였다.
누가 봐도 풍채 당당하고 아직은 젊디 젊은 우리 부모님에 비해서 동기의 어머니께서는 어머니보다는 할머니에 가까우셨다. 하얀 무명으로 쪽진 머리를 고수하고 계신 것으로 보아 문명의 손길이 덜 미친 곳에서 오신 듯했다. 마치 조선시대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오신 노모와 열없게 웃고 있는 동기의 모습이 어쩐지 애잔했다.
머릿속으로 소설 한 편 뚝딱 써낸다.
우리가 발령받은 지역보다 훨씬 더 깡촌, 빈농의 막둥이는 형형한 눈빛과 우수한 두뇌를 가졌지만 학업을 이어가기가 힘든 집안 살림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가 손바닥만 한 밭떼기에서 푸성귀를 일궈서 근근이 밥만 먹고사는 팍팍한 살림살이에 보탬이 되는 길은 빨리 학업을 마치고 돈을 버는 길이다.
평생 자식을 위해 손이 갈고리가 되고 발이 쟁이가 된 어머니의 주름살을 펴 드리고 굽은 등을 곧게 세워 드리는 길이다.
그 길을 앞당기는 것은 2년제 대학이면서 등록금도 싼 교육대학을 졸업하여 선생님이 되는 것이다.
학군단으로 대학 생활 중에 군대도 해결되니 이 보다 더 좋은 길은 없다.
2년은 가난한 대학생이 각종 아르바이트로 조각낸 시간들로 후딱 지나가 버렸다.
3월 1일 자 발령이라는 달콤한 열매를 노모께 안겨 드림이 다행이다.
주름살로 표정을 읽을 수 없는 노모가 듬성듬성한 이를 드러내면서 그렇게나 환하게 웃으시는 것을 처음 보는 것만으로 막둥이의 효도는 장하다.
발령장을 받고도 계속 대기 시간이 길어졌다.
우리의 부임지에 대한 회의를 한다고 했다.
마침내 장학사님이 들어와서 이렇게 말했다.
"정선생님과 P선생님의 부임지를 바꾸느라 시간이 좀 걸렸어요. 성적순서대로 하면 정선생님이 가야 할 학교가 너무 오지라서 여선생님이 근무하시기 힘들어서요. 마침 두 학교의 교장선생님께서 원하시는 성별도 맞기에 바꾸었습니다. 정선생님은 본가와 많이 가까운 면의 학교로 가게 되었으니 다행이지요? 이렇게 해도 되겠습니까?"
나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지만 동기의 의중도 중요했다.
다행히 자기는 어느 학교에 발령 나던 상관없다고 양보(?) 해 주었다.
하지만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동기의 선한 베풂과 배려가 본인의 인생에 얼마나 큰 복으로 다가온 것인 지를.
그 해 9월에 동기의 학교에 또 다른 여자 동기-나와도 잘 아는-가 발령 났고 그 둘은 하라는 교육은 안 하고 청춘사업에 매진하더니 그 해가 가기 전에 결혼 소식을 전해 왔다.
이쯤 되면 그 둘의 결혼의 일등 공신은 바로 나 아닌가?
엄밀하게 따지면 동기 스스로의 이타심과 착한 심성이 복을 받은 것이라는 건 잘 알지만 나의 지분도 있지 않냐고 떼를 써 본다.
각설하고 동기 모임에서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는 두 사람의 러브 스토리에는 이런 히스토리가 있었다.
바뀐 발령장을 받고 너는 상행선, 나는 하행선 기차가 아닌 버스를 타러 터미널로 갔다.
조선시대에서 빠져나온 노모의 가슴팍에는 작은 보따리 하나가 안겨 있었다.
노모와 같이 학교 사택에서 생활할 거라는 동기의 말로 보아 노모의 단출한 옷가지 인가 보다.
허리 굽혀 인사를 나누는 부모님들의 모습을 보며 동기와 나도 쿨하게 하이파이브를 하며 각자의 버스에 올랐다.
미지의 세계로 걸어가는 우리의 발자국 하나하나에 두려움과 걱정과 아주 작은 설렘도 함께 찍혀 있음을 너무 잘 알기에 두 사람 모두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길이 하늘이 내린 천직이길.
소명의식을 갖고 어떤 고난이 닥쳐도 좋은 '선생님'이 되기를 서로에게 빌어 주었다.
수십 년이 흐른 지금, 그때 동기와 노모가 걸어가던 뒷모습이 박제되어 가끔 떠오른다.
우리 어머니도 가끔 그 얘기를 하신다.
"아이고, 그때 그 부자지간의 모습이 참 애달팠데이. 그 선상님은 잘 살고 있지?"
"네, 나와 바뀐 발령지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같이 예쁜 색시 얻어서 아들딸 낳고 잘 살고 있어요."
"참 잘됐네. 김지미와 최무룡이 나오는 영화의 한 장면 같더니만."
눈을 감으면 흑백영화의 한 장면 같은 그때 그 시절도 함께 필름이 돌아간다.
한바탕 꿈을 꾼 듯 이제 그 노모와 비슷한 나이가 되어 가는 나는 여전히 순박함으로 포장한 촌스럽지만 귀여운 병아리 선생님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이 위로라면 위로이다.
실제로 나는 노란색이 잘 어울리고 그래서 많이 입었다는 것은 TMI.
글을 마치며 갑자기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요즘 후배님들은 첫 발령지 교육청에 갈 때 부모님이나 보호자를 대동하고 갈까?
씩씩하고 영리한 후배님들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당당하게 갈 것 같다에 한 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