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극 I 였다.
지구별에 안착한 후 오랜 시간 이 별에서 머물다 보니 많은 것이 변했다.
먼저 몸이 늙고 마음도 같이 익어간다.
타고난 기질은 안 변한다고 하지만 성격은 변하는 것이 분명하다.
부끄럼 많고 소심하고 모르는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지 못했다.
그래서 혼자 가는 여행이라는 것은 고사하고 혼밥도 못해서 쫄쫄 굶으며 집으로 온 적도 많았다.
직장 회식은 할 수 없이 참여하지만 투명인간처럼 앉아 있다가 노래할 차례가-그 때는 노래방에는 왜 그렇게 많이들 갔고, 갔으면 부르고 싶은 사람만 부르면 되지 왜 못하는 사람도 숙제처럼 뺑뺑이를 돌렸는지-되면 바람과 함께 사라져서 냅다 도망갔다.
세월의 풍화작용을 심하게 받다 보니 옛날 같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도 서슴치 않고 한다.
친정 어머니와 지하철을 타고 가는 10분 동안 옆에 앉은 할머니의 신상을 다 털어서 나에게 얘기해 주셨다.
"아이고, 그 할머니는 남편을 젊어서 잃고 오남매를 혼자 기르느라 안해 본 일이 없다더라."
"아까 옆에 앉았던 그 아줌마는 아들을 군대 보냈는데 죽어서 돌아와 평생을 눈물로 산다네. 아이고 불쌍해서 우짜노."
"엄마, 몇 분이나 지났다고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의 일생을 다 꿰차고 계세요? 암 엄마의 친화력은 못말려."
핀잔 아닌 핀잔을 주면서 신기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나에게도 엄마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도도히.
양평살이 한 달이 되던 어느 토요일 오후.
'양평 도서관'에 갔다.
손주 녀석 3명과 함께 간단한 먹거리를 싸서 왔기에 휴게 공간에서 간식 타임을 벌이고 있었다.
그 옆에서 알록달록 오색실을 바늘에 꿰어 실보다 더 고운 천으로 뭔가를 만드는 아주머니 3명을 발견했다.
그 중 한 분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이 애들이 모두 집의 애기예요?"
"네? 제가 그렇게 젊어 보여요? 할머니예요. 할머니."
예쁘다는 말보다 젊다는 말이 훨씬 듣기 좋은 나이다 보니 입이 귀에 걸렸다.
알프스 소녀는 아니지만 양평의 할머니 다운 나폴나폴한 원피스에 예쁜 모자를 쓰고 있었기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서 듣게 된 황송한 말이었다.
"네? 할머니라구요? 할머니라고 아시기에는 너무 젊어요. 늦둥이인가 했어요."
같이 바느질을 하던 조금 더 젊은 아줌마가 더 이쁜 립서비스로 기분을 붕뜨게 만든다.
나는 완전 무장해제되어 아예 그들과 합석을 하였다.
"뭐 만드세요?"
"아, 한복 선생님과 가방에 달고 다니는 장식품 만들고 있어요."
비단천에 오색실로 나비 모양의 노리개를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부터 시작된 우리의 토크는 일생을 터는 탈곡기가 되어 쉴새없이 돌아갔다.
특히 통성명을 하는 중에 내가 초임시절 2년 동안 동거했던 선배님의 이름과 똑 같은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그 선배는 친언니 이상으로 생각했지만 소식이 두절되어 꼭 한 번 만나고 싶은 그리운 이름이다.
동명인을 만나려고 그랬는지 전날 꿈에 그 선배를 만나서 반가워하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잠에서 깬 후 너무나 아쉬웠던 기억이 사라지기도 전에 동명을 가진 사람을 그 곳에서 만난 것이다.
"어머, 어머, 어머. 이건 운명이야. 랄랄씨를 만나려고 어젯밤에 그런 꿈을 꾸었나 봐요."
잃어 버린 피붙이라도 만난 양 두 손을 맞잡고 한참을 깔깔대며 웃었다.
누가 보면 최소 십년 알고 지낸 사람들처럼 이야기꽃을 활짝 피웠다.
양평살이를 시작한 초보에게 수년 전에 양평에 터를 잡고 살아가고 있는 이들은 조금은 거만하게 양평의 정보를 나에게 전수하기 위해 경쟁하며 열을 올렸다.
"우리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단톡방 만들어서 정보 교환하고 친교해요."
나의 제안에 모두들 좋아했기에 가장 젊은 새댁이 단톡방까지 뚝딱 만들었다.
그리고 양평에 온 신고식을 하기로 했다.
장소는 세컨하우스인 우리집이었다.
"양평은 빵의 성지잖아요. 내가 맛있는 빵 사서 갈게요."
"그럼 나는 과일 좀 갖고 갈게요."
집들이겸 신고식겸 첫 정모일은 이렇게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나는 '단호박오리찜'이라는 쌈빡한 요리를 준비했다.
특별한 날이나 귀한 손님이 오시면 빠지지 않고 준비하곤 했던 나의 시그티처 메뉴이다.
간단 레시피를 공유한다.
1. 단호박을 전자렌지에 2분 정도 가열한 후 뚜껑을 도려낸다.
2. 단호박씨를 숟가락으로 긁어 제거한다.
3. 오리고기, 색색의 파프리카, 양파를 적당한 크기로 썰어 후라이팬에 반만 익게 볶는다.
4. 속을 파낸 단호박안에 3.을 최대한 꾹꾹 눌러 담는다.
5. 4.에다 모짜렐라 치즈를 최대한 듬뿍 눌러 담은 후 도려냈던 뚜껑을 덮는다.
6. 넓은 접시에 올려 놓고 다시 전자렌지에 익힌다. 젓가락으로 찔러 보아 단호박이 다 익을 때까지. 보통 10분~15분이지만 단호박의 크기와 렌지의 열에 따라 달라진다.
7. 더 큰 접시에 옮겨 담고 피자처럼 단호박을 자르면 안에 있는 재료가 꽃처럼 피어난다.
만드는 수고에 비해 퀄리티가 심하게 뛰어난 멋진 요리가 탄생한다.
띵똥!
초인종소리를 시작으로 우리의 브런치 타임은 시작되었다.
올리브유와 발사믹식초로 샤워한 샐러드 한 접시와 메인 요리인 '단호박 오리찜', 복숭아, 샤인머스켓, 양평의 맛있는 빵, 스타벅스에서 처음 출시한 인스턴트 커피. 게다가 간단한 점심 식사로 유부초박까지 상이 비좁았지만 마음은 태평양 앞바다였다.
음식은 거들 뿐 십년지기나 된 것 같은 양평의 인연들과의 토킹 어바웃!
이제 나는 극 E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