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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시그니처, 홍시

울엄니

by 정유스티나
홍시1.jpg 까치밥




가을 풍경에서 홍시를 빼면 그야말로 앙꼬 없는 찐빵이다.

초가집이던 기와집이던 마당 한편에 감나무 한 그루쯤은 병풍처럼 서 있다.

꼭대기에 남은 홍시를 다 따지 않고 남겨 두는 아름다운 풍습까지 우리네 정서에는 '홍시'같은 붉은 마음이 있다. 그건 한낱 홍시가 아니라 까치의 주린 배를 채워 주려는 따스한 마음을 대롱대롱 매단 것이다.

드라마 '대장금'의 명장면에서도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고 했거늘'이라는 대사가 공전의 히트를 쳐서 다른 나라에도 우리의 '홍시'를 알렸다.

가을이 오면 제일 먼저 붉게 물드는 감.

그 감이 깊어가는 가을과 함께 홍시로 익어 가면 울엄나의 마음도 말랑말랑해진다.

우리 엄니가 제일 좋아하시는 과일이 홍시이다.

해마다 홍시가 과일 가게를 붉게 물들이면 제일 먼저 울엄니 생각이 난다.

그래서 홍시를 엄니께 보내 드린다.

구순이신 엄니께 드리는 효도치고는 너무 소소하지만 이 세상 어떤 산해진미 보다 더 좋아하신다.

"아이고, 홍시가 참 예쁘기도 하구나."

한 해 중 가장 활짝 웃으시는 엄니를 보는 재미로 가을만 되면 마음이 조급해진다.

어서 빨리 홍시철이 와야 할 텐데...


내 나이 열 살 그 어디메쯤.

외갓집에 가는 길은 늘 설렜다.

지방의 소도시이지만 외갓집 동네에 비하면 대처였고 도시였다.

걸어갈 수도 있는 십리 길이었지만 우리는 늘 택시를 타고 갔다.

동네 어귀에 들어서면 동네 아이들이 차 소리를 듣고 택시를 뺑 둘러 섰다.

택시에서 내리며 마치 미스코리아가 된 듯 손을 흔들던 그때의 뻐김과 황홀감은 오래도록 나의 유년 시절을 풍요롭게 했다. 까맣게 그은 아이들 속에서 뽀얀 피부의 도시 아이의 등장은 그 아이들 입장에서는 나름 선망의 대상이 아니었을까? 이런 나만의 유희는 중학생이 되면서 무참하게 깨지고 더 큰 도시의 아이들에게 주눅 들었지만.

각설하고 아이들의 환대 속에서 외갓집 마당에 들어서면 이가 다 뻐지고 머리가 하얗게 센 외할아버지가 우리를 반기셨다. 그리고 손이 잡힌 채 외할아버지 방으로 이끌려 가면 어김없이 외할아버지의 보물 창고가 열렸다.

외할아버지의 방에 있던 작은 다락에는 자식들이 사다 준 센뻬이 과자나 왕방울 사탕이 있었다.

그리고 곰방대에 채울 담배와 박물관을 방불케 하는 잡다한 오래된 물건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그런데 가을만 되면 홍시가 나란히 나란히 줄을 맞춰 마치 간택을 기다리는 새색시처럼 수줍게 앉아 있었다.

손녀가 왔다고 아끼던 홍시를 한 접시 내어 주셨다.

"할부지, 나 홍시 맛없다. 저 과자 주라."

나는 질색을 하며 홍시를 밀어 놓고 언뜻 보이던 알사탕과 센뻬이 과자를 달라고 떼를 썼다.

"아이고, 야야. 이 홍시가 얼마나 맛있는데 싫다고 하나?"

"할부지는 이가 다 빠졌으니까 몰캉몰캉한 홍시가 좋겠지만 나는 딱딱한 감이 더 맛있어."

철없는 손녀는 팩폭을 날리며 할아버지에게 마음의 생채기를 남겼다.

진짜, 홍시가 뭔 맛?

들쩍지근한 맛도 그렇지만 손에 다 묻혀야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가 아끼고 아끼던 홍시를 홀대했다.


세월이 흘러 흘러 외할아버지와 친구 먹을 나이가 되었다.

세월 따라 취향도 변하고 입맛도 바뀐다.

그렇게 싫어했던 홍시가 요렇게나 맛있을 줄이야.

우리 엄니 홍시 사면서 나도 꼭 한 박스를 쟁겨 놓는다.

백설기에 잼처럼 발라 먹어도 맛있고, 가래떡을 찍어 먹으면 꿀은 저리 가라 한다.

동지섣달 긴긴밤, 냉동실에 살짝 얼려 두었던 홍시를 꺼내 하드 먹듯이 우걱우걱 먹으면 동치미 국물만큼 시원하다.

김장할 때도 홍시를 넣으면 감칠맛이 기가 막히고 건강까지 따라잡은 아주 고급진 웰빙 음식으로 환골탈태한다.

아주 얇은 막만 제거하면 버릴 것이 없는 홍시는 먹는 푸짐함도 선물한다.

게다가 다른 과일에 비해 가격이 저렴해서 얄팍한 지갑에도 부담이 적다.

국민 가수 '나훈아'도 '홍시'를 보면 울 엄마가 생각난다고 노래했다.

나도 '홍시'만 보면 울엄니가 생각나고 울할아버지가 생각나기에 내적 친밀감이 남다른 노래이다.

또 더 많이 세월이 흐른 후에 나의 딸과 손주들도 '홍시'를 보면 '엄마' 즉 '나'를 떠올릴 만큼 홍시 사랑에 흠뻑 빠졌다.

젖가슴대신 우유병을 물렸지만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자식 걱정하는 마음은 가사 속 엄마와 다를 바 없다.

생각만 해도 눈물이 핑 도는 울엄니께 앞으로 몇 번이나 홍시를 사 드릴 수 있을지.

가슴 먹먹한 현실에 가슴이 찡하지만 홍시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홍시2.jpg 울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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