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자 혹은 루키
내가 그 애를 처음 만난 건 12년 전 딸의 오피스텔에서였다.
졸업 후 취업한 직장 근처의 오피스텔에서 둥지를 튼 딸에게 주기적으로 방문하고 있었다.
밑반찬을 위시하여 일용할 양식을 갖다 놓기도 하고, 귀신과 동거하는 듯한 주거환경의 개선을 위해 대청소를 하기도 했다.
여느 날처럼 비번을 누르고 문을 여는 순간 주먹만 한 그 애가 침대에서 꼬물거리며 자고 있었다.
나로 말하자면 동식물을 통틀어 키우는 것에는 똥손이었다. 봄이면 연례행사처럼 화원에 가서 흐드러지게 꽃망울을 품은 화분을 집에 들여놓지만, 그 봄이 가기 전에 거의 모든 애들을 혼수상태 내지는 사망 선고를 하게 된다.
게다가 학교에서 보는 아이들만 해도 버겁기만 했기에 무엇보다 키우는 것에 넌더리가 난 상태였다.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를 거둔다는 것은 온 우주를 책임지는 것이기에 자신이 없었다.
진실을 말하자면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 애들을 무서워했기에, 생명체를 우리 집에 들이는 것은 나의 어떤 계획에도 없던 일이다.
나의 단호한 거절에 반해 다른 가족들의 멍멍이 사랑은 지극했다. 시댁에는 늘 가족 같은 그 애들이 있었고 그중에는 교통사고로 다리 한쪽이 없는 멍멍이도 평생을 거두었다. 애들과 남편의 온갖 성화와 열망을 수십 년 묵살하고 결코 흔들림 없이 나의 신념을 고수했다.
그런데... 그 애가 딸아이의 침대에 있다. 이건 나에 대한 반란이다.
한껏 끓어올라 뚜껑을 들썩이는 주전자처럼 콧바람을 슉슉이며 딸의 퇴근을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 나 사실은 밤에 잠을 잘 못 자. 학업 스트레스로 시작된 불면증이 직장 스트레스로 연장되면서 많은 밤을 악몽에 시달려. 가위는 또 얼마나 자주 눌리는지... 그래서 저 아이를 데려왔어."
"점심을 먹고 산책하는 길에 있던 애견센터에 애기들 보러 갔는데 구석의 허름한 박스 안에 버려져 있는 거야. 장이 너무 안 좋아서 오래 살 것 같지 않아서 죽기만 기다린다는 거야. 그런데 계속 얘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거야. 마치 나를 보는 것 같아서 외면할 수가 없더라고."
정신이 아뜩했다. 딸의 심리상태가 이렇게나 불안한 줄 몰랐다.
대학을 수석으로 합격하여 전 과목 A+를 받으며 모범답안 같은 성적표를 인쇄하면서 수석으로 졸업한 딸의 시간들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엄마라는 타이틀을 단 사람이...
"엄마, 용자가 오고 나서 잠을 참 잘 자."
남자애라는 데 이름을 '용자'라고 지었단다. 용감하게 자라라.
원래 귀한 아이일수록 천한 이름을 지어주니까 병약하게 태어난 이 아이에게 딱 맞는 이름이라는 딸의 작명센스에 또 한 번 울컥했다.
용자가 딸의 불면증을 치료해 주었다니 동물이라면 십리 밖으로 도망가는 나도 그 애가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내가 일이 바빠서 몇 달 만에 딸의 오피스텔을 방문했다.
아무 생각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마치 산곰같은 애가 현관으로 펄쩍 뛰어오는 것이 아닌가?
엄마야 단발마를 외치며 기겁을 하고 화장실로 피신했다. 그랬다. 강아지들이 이렇게 빨리 폭풍 성장한다는 것을 몰랐기에 주먹만 한 애기라고만 생각했기에 방심했다. 화장실 청소만 후다닥 해 치우고 딸 방을 빠져나왔다. 아니 도망쳐 나왔다. 딸이 퇴근할 시간까지 근처 백화점을 백 바퀴 돌았다.
나는 역시 강아지는 못 키워!
딸이 결혼을 했다. 개는 마당에서나 키운다고 생각하기에 집 안에서 키우는 반려견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이상한? 성격의 사위 때문에 용자를 신혼집에 데려 가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용자는 우리 차지가 되었다.
용자가 우리 집에 오는 날 나는 바닥을 밟지 못했다. 계속 침대 위나 소파 위로 뛰어오르느라.
그랬던 내가, 산천이 개벽할 일이다.
내가 '개엄마'가 된 것이다. 물고 빨고 침대에서 함께 자고 우리 아들로 입양해서 유산마저 물려주고 싶을 지경이 되었다. 가족은 사람이 이렇게나 심하게 바뀔 수도 있구나를 연신 놀라워했다. 사실은 내가 제일 많이 놀랐다.
하루는 산책을 하면서 '용자야' 했더니 지나가는 아주머니가 우리 언니 이름도 용자인데 한다.
아들놈에게 여자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싫어서 개명을 선포했다.
"아무리 그래도 용자가 뭐야. 우리 집에 출현한 슈퍼루키이니 '루키'라고 부르는 건 어때?"
딸은 용자, 나는 루키라고 부르며 그렇게 우리에게 스며들었다.
브라운 스타에서 온 아이인데 생긴 건 원빈 뺨친다.
쭉쭉 뻗은 두 다리를 보면 루키의 조상은 다른 별에서 온 것이 분명하다.
산책길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그놈 참 잘 생겼다 하는 말에 마치 내가 낳은 것처럼 으쓱해진다.
어쩌다 개를 다 낳았슈?
미남이시네요
루키가 우리에게 온 지 벌써 13년이 되었다. 이제는 원래의 엄마를 잊은 듯 우리와 함께 늙어간다.
내가 나이 먹는 것보다 우리 루키 나이 먹는 것이 더 먹먹하다.
생각도 하기 싫은 언젠가는 맞이할 이별의 순간을 떠올리면 심장이 먼저 터진다.
가끔 미용하느라 몇 시간 루키가 없으면 온 집이 텅 빈 것 같다.
반려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는 위대하다.
사랑 그 이상이며 자식과는 또 다른 애틋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