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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북 Apr 15. 2023

죽고 싶은 딸, 죽고 싶은 며느리

난 요즘 아빠 장례식장 예약하는 상상을 하면서 잠을 자.


혹시 달콤한 거 좋아하세요?

치즈케이크 하나랑 파이 하나 먹을까요?




2월의 어느 날, 바람에 차가움이 묻어나지만 햇빛에는 너그러움이 있던 날씨에 우린 만나게 되었다.

아담한 키에 서글서글한 눈매를 가진, 화장기 없는 얼굴과 곱슬머리의 썬이 통통 튀는 맑은 억양으로 계산대에서 말을 건다. 어떤 사람일까? 어떤 성격일까? 잠 못 이루는 새벽을 겨우 넘긴 채 두근대는 마음으로 만난 썬은 걱정과는 달리 탄산음료같이 쾌청한 분위기의 친구였다. 그에 비하면 나는 주제에 낯을 가리느라 꽤나 뻣뻣한 상태였는데 그런 내 마음을 물렁물렁하게 녹여주는 건 이 상황에서도 달달한 걸 먹겠다는 썬의 대쪽 같은 취향이었다. 태생이 빵순이인 나는 본능적으로 동족임을 감지했고 그러므로 미끄러지듯 마음의 문이 열리는 것을 고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인적이 드문 골목 카페 2층. 썬과 나는 케이크를 받아 들고 어색하게 마주 앉았다. 뻘쭘함에 데룩데룩 굴리던 눈이 마주쳤을 때 얘도 내 맘과 같구나 하는 확신이 들며 무슨 말로 시작해야 할까? 고민하던 중 썬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말 편하게 할까요?"


우리가 가져온 서로의 이야기는 너무나 컸고, 길고, 묵직했기 때문에 존대는 쓸데없는 무게를 더할 뿐이라는 썬의 제안은 실로 현명한 것이었다. 말 끝을 싹둑 잘라내자 분위기는 한결 가벼워졌고, 그렇게 썬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결혼 4년 차. 90세의 홀시아버지 치매수발을 하는 며느리라는 빡센 타이틀 뒤에는 그에 못잖은 빡센 스토리가 있었다. 결혼 전에는 괴팍한 성정의 시아버지 때문에 파혼직전까지 갔고 그 후에는 시아버지의 치매 발병. 초기부터 중기까지 약 2년간을 치매 수발을 들고 있다고 했다. 이야. 명절 특집 단편 드라마, 혹은 인간극장에서나 나올 거 같은 캐릭터가 바로 내 앞에 있구나, 이런 이야기를 커뮤니티에 올리면 제발 이혼하세요 하며 도시락 싸 들고 썬을 말릴 사람들이 일렬종대로 한 소대는 될 것이다. 이 하드코어한 신혼생활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그녀의 글 속 '숨이 콱콱 막혀 죽을 것 같다'라는 문장이 절로 떠올랐다. 그만큼 타인들은 감히 짐작도 못할 숨 막히는 고통과 역경을 견디며 넘어지고 일어서길 반복하며 (최대한 아버님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방법을 찾는 그녀의 뒤통수에서 후광이 보인건 내 시력문제는 아닐 것이다.



썬과 내가 딸과 며느리의 입장으로 만난 건 어쩌면 꽤나 다행이라고 볼 수 있는데 같은 자식의 입장에서 만났다면 서로의 입장 차이나, 관점적인 부분 등에서 비교가 되어 너는 그래도 요 정도잖아. 나는 이만큼이라며 불행배틀이 열릴 수도 있었겠으나 며느리와 딸이기에 반려자의 입장에서 대변해 주며 위로를 해줄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내가 남편에게 가지고 있는 짙은 부채감에 대해 썬이 명쾌하게 답을 내주는 식이다.


"너무 미안해하지 마. 가족이니까 하는 거야. 네 남편도 너와 네 아버지를 가족이라고 생각하니까 할 수 있는 거지! 그런 걸 미안해하는 게 어쩌면 남편을 더 서운하게 할 수 있어. 고맙다는 마음만 진심으로 표현해주면 돼. 나는 그게 힘이 되더라구"


성질 고약한 아버지를 가진 죄로 지레 주눅 들어었던 내 쪼그라든 마음속에 온기가 전해 지는듯하다. 그야말로 표적을 정확히 관통하여 마음속 깊숙이 꽂히는 위로에 마음이 찡해졌는데 그녀의 남편과 내 삶의 궤적이 너무나도 비슷한 관계로 나 역시 화답을 해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너희 남편도 너 같은 배우자를 만난 건 전생에 지구를 두 번 정도 구했나 싶을 만큼 큰 선물이라고 생각할걸? 내가 남편에게 갖는 마음은 부채감도 크지만 사랑도 커. 네 남편도 그럴 거야. 목숨을 내줄 수 있을 만큼! 말로 설명 못할 고마움이고 사랑이야. "


이런 식으로 말이다.

썬과 나는 "정말 그럴까?" "그럼 그렇고말고!" 라며 서로에게 힘을 불어넣어 줬고 그 순간 우리는 서로에게 존재 자체가 위로이자 선물임을 명징히 깨달을 수 있었다. 또한 서로의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내내 소름이 돋았으니 놀라우리만큼 비슷한 두 아버지들의 모습이 그 이유였다. 돈에 집착하는 아버지 / 모자에 집착하는 아버지 / 감성이 풍부한 아버지 / 신경 써주지 않으면 삐지는 아버지 / 전화 안 하면 화내는 아버지 / 입맛이 까다로운 아버지 / 리액션이 풍부한 아버지....

심지어 매달 생활비 100만 원을 내놓으라 당당히 요구하는 모습까지도 똑같아서 어디 이름 모를 곳에 있는 학원에서 할아버지들 상대로 자식들에게 '생활비 100만 원을 뜯어내는 법'을 따로 가르쳐주나 싶은 생각이 들었을 정도다. 이 소름 돋는 공통 키워드는 무엇이란 말이냐. 혹시 너의 시아버지가 우리 아빠의 6.25 때 생이별한 쌍둥이형제인것이냐.라는 둥의 시답잖은 농담을 하며 깔깔깔 웃어대기 바빴고 서로의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재미난 소설책을 읽듯 열정적으로 경청하고 또 위로했다





준비한 이야기보따리의 입구를 막고 있던 자잘한 소주제들을 깔깔대며 소모하고 나니, 저 밑에 깔려있던 고통과 불안의 찌꺼기들이 서서히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포크로 반절 정도 남은 케이크를 깨작이며 접시 바닥을 긁어대는 날 끝의 기분 나쁜 쓱싹거림과 함께 입을 뗀 건 나였다.


난 요즘 아빠 장례식장 예약하는 상상을 하면서 잠을 자. 그래야 잠이 오거든

대체 이 고통이 언제까지일지 모르겠어. 그게 너무 불안해. 차라리 기간이 정해져 있다면 이렇게까지 힘들진 않을 거 같아. 있지 썬. 나는 우리 아빠가 날 좀 그만 괴롭혔으면 좋겠어.

어.. 그니까.. 이제 그만 돌아가셨으면 좋겠어..


지나가던 사람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그 좁은 카페에서 누구라도 들었으면 욕 얻어먹기 딱 좋은 상패륜스러운 말들을 줄줄 쏟아냈다. 아니 쏟아져버렸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듯하다. 한번 뱉어내기 시작한 것들은 봇물 터진 양 감정의 파도에 밀려 미친 듯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런 말을 부모도 아닌 시아버지를 위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노력하고 있는 썬에게 해도 될까? 하는 찰나의 고민들도 쏟아져 나오는 감정들에 휩쓸려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그 순간 대화의 기능은 소통이 아닌 그저 방출로써 존재했기에 불가항력이었다. 헉헉대며 모든 걸 쏟아내고 나니 그제야 덜컥 불안한 마음이 든다.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보면 어쩌지..'

슬그머니 바라본 썬의 눈에는 눈물이 그득했고, 이윽고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나도 그래..... 나도 우리 아버님이 이제 그만 돌아가셨으면 좋겠어.."



거대한 슬픔의 너울이 우릴 덮쳤다. 이 좋은 날 이런 이야기를 하는 우리가 너무 애처롭고 슬퍼서.

우리의 소원으로 몇 번씩 죽임을 소망당하는, 아버지들이 불쌍하고 또 불쌍해서.

누구보다 잘해 드렸다 자부하고, 또 더욱 잘하려고 노력했던 우리의 젊음, 사랑, 효도의 결말이, '이제 그만 돌아가셨으면'으로 채점된 성적표가 억울해서. 썬의 눈물을 보니 나도 내가 너무 불쌍해서 눈물이 줄줄 났다.

그렇게 죽고 싶은 딸과 죽고 싶은 며느리는 살고 싶어서 엉엉 울었다.


한바탕 눈물을 쏟아낸 후 우린 결연한 마음가짐으로 "폭력적이고 문제가 많은 우리 아빠들을 최대한 보듬어줄 깨끗하고 좋은 요양병원을 찾아 입원시키기"를 기약하고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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