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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북 May 02. 2023

등급 외 판정

할아버지가 집에 갇혀있다며 베란다에서 소리를 지르셨어요.


장기 요양등급 외 판정이십니다.


그럴 리가 없는데요..?


내 생각이야 어쨌든 오피셜로다가 아빠는 -등급 외-로 판정이 났다.

썬의 조언에 따라 장기요양등급신청을 했고, 얼마 후 장기요양등급판정단이 방문하여 아빠를 심사하고 가셨는데 함께 있던 남편의 후기에 따르면 아빠는 그들에게 커피까지 직접 타서 대접하는 여유를 보였다고 한다. 사실 요양병원을 가셔야 하는 아빠에게는 등급이 큰 의미는 없다. 요양보호사를 들여 자택에서 케어해야 할 케이스도 아니고 요양원이나 주간보호 센터 등은 아빠와는 관계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여 심사 신청을 하였으나 막상 등급 외 판정을 받으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의 범위가 좁아진 듯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장기요양등급 외 판정-

노인장기요양등급을 받고자 신청을 했으나 조건에 해당되지 못해서 탈락한 노인들 중에 지자체의 돌봄이 필요한 분들에게 내려지는 것

MRI 정상. 등급 외 판정. 어르신은 치매가 아닙니다.라는 담당의의 말

모든 지표는 아빠가 정상이라 말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겪은 아빠의 모습은 치매라고 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인정을 하지 못했다. 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치매여야만 치매여야지 아빠를, 이 현실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시점에선 의미 없는 고민이다. 나를 분리시키고 아빠집으로의 자진출근을 선택한 남편은 퇴근 후 저녁에나 아빠에게 들를 수 있었고, 그래서 아빠는 거의 하루 종일 혼자 집에 있다시피 해야 했는데 수시로 연락을 해서 언제 오냐, 밥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 재촉하는 것에 살짝 짜증이 난 남편이 "오늘도 밥 이야기만 하시면 너처럼 요양병원 가시라고 단호하게 말해봐야겠어"라고 굳은 맘을 먹고 갔으나 지킬앤하이드마냥 온순 모드로 대기하는 아빠에게 맘약해져 말도 못 꺼내고 돌아오기를 반복했기 때문.

아빠의 기분 그래프 역시 퇴원 초반엔 오락가락 변동폭이 심했으나 나와 분리가 되고 난 후부터는 조금씩 안정세를 되찾아 '정말 정상이 된 것처럼'보였기 때문에 남편마저 아버님 인지가 좋아지시는 거 같아. 조금 기다려볼까.. 라며 휴전 선언을 할 정도로 호전이 되고 있었다. 

혹시 이거 아빠의 빅픽처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로 상황이 아빠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으니 치매에 연연하는 게 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장기요양등급 외 판정이 온점을 찍었다.


-뭣이 중하냐고-





아빠가 좋아지고 있단 소리를 들으니, 몇 주 전까지 나를 가득 채운 증오가 눈 녹듯 사라졌고 거기다 조금씩 기력을 되찾은 나는 슬슬 아빠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몸은 집에 있으나 마음은 아빠 옆으로 꾸물꾸물 기어들어가 밥은 제때 먹는지 등등 '오빠가 연락해서 뭐하는지 물어보라'며 남편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가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으나 애초에 그리 쉬운 상대였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버님. 저 오늘은 현장을 다녀와야 해서 저녁에 못 갈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는 남편에게 '그래그래, 내가 밥 잘 챙겨 먹고 있을 테니 걱정 말고 모레나 와라'하던 아빠의 착한 말 뒤에는 생각지도 못한 계획이 도사리고 있었으며 역시나 우린 한발 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폭풍전야의 온순함. 아마 그런 것일지도..


평화로웠던(?) 그날 오후 아빠의 아파트 경비실에서 전화가 한통 걸려온다.


"1004호 할아버지 따님되시죠? 지금 경찰 오고 난리 났어요! 지금 당장 오셔야 할 것 같은데 어디세요?"


아파트 내 비상연락망으로 연락을 한듯한 경비원의 전화를 받고 눈썹 휘날리게 뛰어가니 이미 상황은 일단락이 되어 있었다. 경비실 앞에서 이야기를 듣는데 난리가 따로 없었던 듯 싶다.


"할아버지가 집에 갇혀있다며 베란다에서 소리를 질러서 아주 한바탕 소란스러웠어요."


아빠가 우렁찬 목소리로 살려달라고 배고프다고 베란다 문을 열고 10분이나 소리를 질렀단다. 그 목소리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놀래 신고를 했고 경찰이 와서 상황을 확인해 보니 별일 아닌 고로(?) 동사무소의 긴급복지부서를 연결해 주어 구호음식이 전달되고 마무리된듯했다.



"저 할아버지가 저런 양반이 아니었는데 왜 저러셨대?"


저도 아저씨와 같은 의견입니다.

도대체 왜??? 


섬망이 남아있을 시기는 지났으니 정말 제정신 아니면 치매 둘 중 하나다. 요양등급심사원들이 아까의 모습을 봤었어도 과연 등급 외 판정을 내렸을까? 나는 이 모습이 제정신이라는 것에 정말 동의할 수 없었기에 자꾸만 머릿속에서 왜!?라는 물음이 뿜어져 나왔으나 이것에 대한 답을 어디서 찾을 수 있단말인가?

남편이 하루에 한 번씩 음식을 바리바리 싸가지고 들르니 남는 음식이 문제지 모자란 음식에 대해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배고파서 굶어 죽겠다며 밖에다 소리를 지른 아빠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으며 또 그걸 이해를 하려는 내 모습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조금씩 회복되고 있던 멘탈도 다시 무너졌다. 노인을 저리 두면 어찌하느냐는둥 한바탕 꾸짖을 마음으로 전화를 거셨을(목소리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경비아저씨도 시퍼렇게 질린 우리 부부의 얼굴을 보시곤 딱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차시며 , 비상연락망 연락처에 남편번호와 자택번호까지 추가로 기재하게 한 후 무슨 일이 또 생기면 바로 연락을 주겠다며 우리를 아빠에게 올려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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