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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북 Apr 30. 2023

받지 못하는 생일선물

아빠와 내 생일초를 끄는 날은 더 이상 없겠지.


슬픔은 나누면 두 배가 된다.


아침 9시부터 휴대폰에 불이 난다. 진동이 두어 번 울리다 꺼지고를 반복하더니 화장실 다녀온 사이에 부재중 전화가 10통이 넘게 떠있다. 11번째의 전화를 받으니 아빠의 짜증 난 목소리에 '아 오늘 하루도 순탄치는 않겠구먼'싶다. 너는 시간이 몇 신데 지금까지 자고 있냐며. 새벽같이 와서 자기를 살펴줘야 할 거 아니냐며. 니는 정상이 아니라며 화를 내더니만 갑자기 받아 적으라 재촉하며 불러주는 것들은 '병어, 간재미'따위의 생선이름이다. 본인은 이것을 오늘 꼭 먹어야겠으니 당장 가져오라 요구함에 내가 고분고분하게 대답하지 않았을 건 당연한 일이고 따라서 아빠의 벼락같은 고함과 함께 통화는 끝이 났다.


"안서방, 미안하지만 애엄마 동생가게에서 (둘째 이모가 우리 동네에서 향토 음식점을 하시고, 아빠는 그 사실을 기억해 냈다.)  병어 찜을 좀 얻어줄 수 있겠나. 안되면 어쩔 수 없고.. 이런 부탁해서 미안하네."


그리곤 곧바로 남편에게도 아빠의 전화가 왔다며 카톡이 왔는데 저리 말하셨단다. 이 무친 온도차는 무엇이란말인가. 나한테는 아침댓바람부터 전화해서 온갖 짜증짜증을 다 내더니만은. 차라리 내게 이렇게 말해줬더라면 눈물을 줄줄 흘리며 병어 할아버지라도 가져다 바쳤을 텐데 안쓰럽게도 아빠는 사위를 잘 몰랐다. 남편은 아빠의 요구를 나만큼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따라서 무리한-선을 넘는-아빠의 요구를 들어줄 마음 또한 없었으니 말이다. 또한 언제부턴가 남편에게 다이렉트로 연락하여 이것저것 해오라는 횟수가 늘어갔으며 남편은 점점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네 말이 맞다. 하나둘씩 들어드리니 점점 요구사항이 느시는 것 같아. 자꾸 전화하셔서 드시면 안 되는 음식들을 사 오라고 하셔. 드시고 싶으신 게 너무 많으신가 봐.."

"아.. 내가 진짜 면목이 없다. 일하느라 정신없는데 아빠 전화까지.."

"괜찮아. 근데 오늘은 내가 컨디션이 별로라 오늘저녁엔 같이 못 갈 거 같아. 괜찮으면 혼자 가서 좀 챙겨드릴래? 아버님 요구조건은 내가 앞으로 강경하게 받아쳐볼게."

"응 다녀올게 미안해. 오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 했던가. 아니다.

나의 거대한 슬픔. 대머리 할아버지를 나누니 고통이 두 배가 되었다. 아빠는 이따만큼 큰 고통과 고난을 반으로 뚝 잘라 모자라지 않게 꾹꾹 눌러 담은 후 이름표를 붙여 우리 둘에게 각각 전달해 주었다.

남편은 남편의 몫만큼, 나는 내 몫만큼. 두 개의 고통은 나눈다고 편해지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오롯이 그것의 주인만이 겪어내야 할 숙제 같은 것이었기에 나는 내 몫의 고통으로 신음했고 남편은 남편의 몫을 처리하느라 분주했다.

그래도 우리에게 축복인지 모를 시간들은 흐른다. 아빠가 퇴원한 지 벌써 일주일째의 날이기 때문이다. 아빠가 드셔야 할 수많은 약들을 처방받기 위해 입원하셨던 병원에 방문하여 담당의와 상담하니 아직도 요양병원에 안 모셨냐며 되물었다. 아버님은 나이와 지병에 비해 체력이 상당히 좋으셔서 저 상태로 아마 오랫동안 끄실 확률이 높다는 식의 청천벽력 같은 악담(?)은 덤으로.

그날 나는 병어와 간재미 대신 설렁탕 두 그릇을 포장해 아빠에게로 갔고, 한 번도 티비를 끄지 않은 것처럼 방을 가득 채운 소음 속에서 아빠는 쿨쿨 잠을 자고 있었다. 우렁각시마냥 아빠가 일어날 새라, 설렁탕을 냄비에 붓고 밥을 하고 대충 집을 정리한 후 후다닥 나온 그날 이후 나는 아빠에게 가지 않았다.






먼저 의견을 낸 건 남편이었다.


아빠와 나를 한집에 두는 게 불안하다는 이유였다.

내 입장에선 매우 억울한 것이었다. 뭐라도 해보려고 발버둥 치며 약까지 털어먹고 아빠에게 꾸역꾸역 출근하고 있는데! 하지만 남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남편은 아빠한테 어떠한 상처도 받지 않았고 영문 없는 분노 또한 받아내지 않고 흘려보낸다. 일할 때 연락 오면 조금은 귀찮은 정도가 애로사항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딸인 나는 달랐기에 아빠가 집어던지는 상처들을 고대로 받아내고 있었다. 놓칠라 싶으면 주워다가 스스로 곱씹으며 생채기를 내고 아빠에게 마구 되받아 쳐낸 후 무방비한 노인을 공격했다는 사실이 너무 싫어 자괴감에 빠져 엉엉 울기도 했다. 우리 부녀의 상태는 퇴원 이후 점점 더 위태로워지고 있었기에 아빠의 입원 초기 때처럼 우리 둘을 격리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든 남편이 이쯤에서 제동을 걸었고, 덕분에 난 아빠가 있는 그 집에 더 이상 가지 않을 수 있었다


다행히 격리조치는 효과가 있었다. 대타 주자인 남편이 가면 아빠는 순한 양처럼 변했고 나한테처럼 역정을 내거나 심한 말을 하는 경우도 없었으니 모두에게 행복한 결정이었다.

이따금씩 "아이스크림을 드시고 싶다는데 드셔도 되나? 뭐 좋아하시나?" "수면제를 좀 타 달라고 하시는데 수면제 드시면 안 되지 않나?"라는 남편의 메시지가 오면 "응 아이스크림은 그냥 드시게 둬, 배스킨라빈스에서 파는 호두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니 그거 사다 드려" "수면제는 약 봉투에 동그란 알약 반으로 쪼개둔 가장 조그마한 약이야. 쿠에타핀 정인데 그건 자기 전에 하나씩 드시라고 해"라 전하며 마치 아바타마냥 남편을 진두지휘하며 아빠를 보살폈다.




받지 못하는 생일선물에 대하여


시간이 흘러 2월이 왔다. 시간이 느리듯 빠르다. 아니 빠르듯 느린가. 병원에서 한 달 정도, 집에 와서 일주일정도의 시간이 흐르니 어느덧 내 생일이다.


해야 할 말에 앞서 잠깐 가족구성원 소개를 해야 되겠다. 언급한 대로 엄빠는 재혼부부다. 아빠에겐 나를 요리조리 때리길 좋아했던, 친엄마 따라 미국으로 간 언니 한 명이 있고 엄마에겐 아들 두 명과 딸이 하나 있다. 이 사실은 내가 중학교 때 알게 되었다. 그러니 이 둘에게 도합 다섯의 자식이 있는 꼴이다.

타임머신이 있어 과거 여행을 간다면 젊을 때의 엄빠 둘을 내 앞에 앉혀놓고 "자식도 낳을 만치 낳았으면서 뭐 좋은 꼴을 보겠다고 또 결혼을 했어요?" 물어보고 싶다.

여하튼 나의 출생이 가족구성원에게 축복, 기적, 행복 따위의 감격적인 메시지가 아니라는 걸 어린 나이부터 체감하며 살았으니 그냥 핑계로 맛있는 거나 먹고 보복 소비(?)나 하자 싶은 게 생일이 갖는 의미의 전부였고 비싼 케이크를 죄책감 없이 살 수 있는 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거 같다.


그래도 굳이 굳이 찾아보자면 좋은 게 하나 있다.

아빠는 내 생일날이면 늘 동네 빵집에 들러 본인이 생각하기에 가장 합리적인 형태와 가격의 케이크를 골라 사 오곤 하셨다. 가끔 운 좋게 내 생일과 본인의 기분 좋은 상태가 맞아떨어질 때는 사비로(!) 전복과 갈비를 사서 찜도 하고 미역국에도 넣고 한껏 차려 조그만 방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함께 조촐한 파티를 했었고, 그 기억이 나에게는 무척 좋은 추억이다. 그 충만함이 소중해서 생일날만큼은 아빠와 함께 하기 위해 늘 시간을 비워뒀었다. 그것은 결혼 후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번 생일은 아빠가 사 온 케이크도 없고 갈비찜도 없다. 정신과 약에 찌들어 해가 중천에 뜬 대낮까지 정신을 못 차리는 나와 배가 개구리처럼 부푼 채 먹고 싶은 음식 리스트만 줄줄이 읊어대는 아빠만이 있을 뿐.


생일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살아왔어도 아빠와 함께 하는 생일날의 충만함은 제법 좋은 선물 같다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그 선물을 다신 못 받는다는 사실이 낯선 상실감으로 다가왔으며 나는 조금 더 우울해졌다. 늘 받던 것을 못 받으면 서운한 법이니까.

상실의 늪을 허우적대고 있으니 친한 친구 두 명이 생일 축하를 해준다며 나를 끄집어내 줬고 케이크의 초를 끄는 순간까지 혹시 아빠에게 연락이 오지 않을까 휴대폰을 뒤적였지만 끝내 전화는 울리지 않았다.

(그날 남편에게 아빠의 동태에 대해 물어보니 "아버님은 니 생일에 관심도 없으시고 오직 본인 먹고살 것만 걱정하고 계셔"라고 답해줬고 나는 더욱 좌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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