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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북 May 06. 2023

소변실수를 하다.

치매의 시작점이 배변 실수부터라는 소리를 주워들은 게 퍼뜩 생각났다.

막걸리를 한가득 사놨더라니까



혼자서 살아보겠다 선전포고를 한 후 한 아빠의 연락은 뚝 끊겼다. 보통이면 아침에 한번 점심에 한번 그마저도 아니면 부재중 전화라도 한통 찍혀있을 법하건만 남편의 핸드폰까지 찍소리 않고 조용하다. 아빠가 시간마다 연락해 남편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도 불편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조용해지면, 정말 cctv를 하나 달아놔야 할까 싶을 정도로 불안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렇게 저녁이 오나 싶었으나 3시경쯤 모르는 전화번호로 전화가 한통 걸려온다. 작금의 상황에서 모르는 번호는 스팸보다 더 나쁜 경우가 많고, 그 예상은 어김없이 맞아떨어졌다.


"1004호 할아버지 따님 맞지요? 나 이 아파트 14층에 사는 사람인데 할아버지가 좀 이상하시길래 따라가 보니 집 앞에서 번호를 까먹으셨는지 에휴... 계속 문을 못 열다가 오줌을 싸셨네 그래. 지금은 어떻게 열고 들어가신 거 같은데~ 저기.. 할아버지 치매 맞지요? 아휴 따님이 지금 좀 와서 들여다봐야 할 거 같아요."


치매의 시작점이 배변 실수부터라는 소리를 주워들은 게 퍼뜩 생각났다.

썬의 시아버지 역시 치매 초기 길을 가시다 실수를 하셨다 하셨고, 그 사연을 듣고 나는 "그래 우리 아빠도 길거리에서 똥이라도 싸서 충격 먹고 병원 좀 들어가셨으면 좋겠다."라고 못 돼먹은 막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막상 그 상황을 마주하니 정말 너무너무너무 무서웠다.

상처를 덜 받기 위한 방어기제가 발동한다. 논리적으로 상황을 정리해 보는 것이다.

'아빠는 오랫동안 집을 비워놨으니 그래 비번 정도는 생각 안 날 수도 있어. 나도 누가 가끔 공동현관 비번 물어보면 멍해질 때 있잖아. 그리고 아빤 이뇨제를 많이 드시니 소변을 참기가 더욱 힘드셨을 거야. 별거 아니야, 그래 그럴 수도 있는 일이야'


퇴근길 아빠에게 갈지 말지 고민하고 있던 우리에게 (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문 앞에서 소변을 실수한 날, 우리가 기다렸다는 듯 등장한다면 아빠의 cctv 망상증상이 더 증폭될 것 같았기에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웠다) 아까 연락해 주셨던 14층 이웃분께 전화를 걸어 상황을 재차 물었다.


"10층 할아버지 엘리베이터에서 종종 뵀지 인사도 하고~. 보름 전인가? 그래 구급차로 실려왔을 때부터 아이고 뭔가 안 좋으신가 보다 했는데  오늘 밖에서 잠깐 보니 걸음걸이도 이상하고, 뭔가 이상해서 따라가 보니까 그러고 있더라고. 그리고 무슨 막걸리를 그렇게 사 왔는지 봉지에 한가득이고.. 내가 따님 전화번호 좀 달라고 해서 전화한 거야. 내가 요양보호사거든. 그러니까 내 눈에는 다 보여요. 할아버지 치매 맞는 거 같은데 저렇게 집에 혼자 두면 큰일 나지."


"네. 그렇죠.. 몸이 안 좋으셔서 요양병원에 모셔야 하는데 죽어도 안 가시겠다 버티고 계시는 중이라 저희도 어쩔 도리가 없어요. 무조건 집에만 계시겠다고 고집을 부리셔서요. 그나저나 막걸리요?"


아빠의 몇 없는 장점이자 우리 부녀의 관계가 파탄 나지 않았던 이유 중 둘 다 음주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선천적으로 술에 약한 하드웨어로 태어났기에 아빠는 무언가 이슈가 있을 때(뭐.. 사기를 당했다던지.. 사기를 당했다던지..)에도 짜증과 히스테리는 마음껏 부렸지만 주사는 없었으니 그나마 다행인 일이다. 또 우리는 술을 먹으면 취하는 게 아니라 몸살이 난다. 때문에 본인 몸을 끔찍이 아끼는 아빠에겐 술은 정말 기호식품축에도 끼지 못할 존재였는데 그런 아빠가 막걸리를 한가득 사 왔다는 말은 받아들여지지가 않아 되묻고도 한참을 갸웃했다.


"아휴 그래, 막걸리가 한가득 있더라니까. 막걸리뿐이 아니야~고기랑 온갖 먹을 거를 엄청 사가지고 오셨어. 그거 들고 오다가 힘 빠지신 게 아닌가 싶어요."


"아... 그래요. 상황이 정말 안 좋네요. 몸이 아프셔서 시설도 못 들어가시고 병원엔 안 가신다고 하시고 등급이 안 나와서 나라에 요양보호사를 신청할 방법도 없어요. 남편이 매일 왔다 갔다 하는데 혼자 살아보시겠다며 화내시더니만 밖에 나가셨나 보네요."

"노인들이 다 그렇지~그래도 저렇게 두면 안 돼. 아파트 옆 오피스텔 20층에 사무실이 있으니까 한번 들러요. 도움 줄 수 있는 거 있으면 도와줄게요. 오실 때 미리 연락 주고. 응?"


내 마음은 마치 간조와 만조 같았다. 어느 때면 터져나갈 것같이 팽팽하게 눈물이 밀려왔고 어느 때는 따가울 만큼 바싹 말라버리기도 했으니. 장을 가득 봐오셨다는 말에 다시금 차오르는 슬픔이 쩍쩍 갈라진 마음속으로 밀려들어왔고 그 사이로 따갑게 스며들어 속이 화끈거렸다.

아빠는 혼자서도 살아낼 수 있음을 우리에게 증명해 보이기 위해 본인도 통제하지 못하는 감정들을 비집고 마트에 간 것이 아닐까. 아빠는 10년 전 사고로 한쪽 무릎을 다쳐 걸음걸이가 느리고 무겁다. 느리고 무거운 아빠가 걸어서 왕복 10분 거리의 마트에서 장을 보고 간신히 집에 돌아왔으나 비번이 기억나지 않아 문을 열지 못하고 집 앞에서 소변 실수를 했을 것이다. 그 처참할 심정과 당황할 아빠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져서 전화를 끊고 한참을 멍했다. 슬픔의 파도가 한참을 철썩거리다 이내 잠잠해짐을 느꼈고, 이제 내 몸 곳곳으로 스며들겠구나 싶어 마음의 준비를 해본다. 눈물조차 나지 않는 고요한 슬픔은 이제 내 일부가 되어있었기에 그저 숙연히 받아들이는 수밖에 답이 없다. 그리고 새로운 인물의 등장에 또 한 번 용기를 내보는 수밖에 없다. 나에겐 그 길 뿐이다. 


아빠는 아빠대로 나는 나대로

우리 부녀의 도전은 필사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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